사이버펑크> 가변의 존재 '기억'을 붙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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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가변의 존재 '기억'을 붙잡다
  • 입력 : 2022. 03.14(월) 14:35
  • 곽지혜 기자
사진을 찍듯 책의 페이지 모습을 그대로 각인시키는 암기법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공부를 하는 학생, 업무를 처리하는 직장인, 연구를 거듭하는 과학자까지. "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 저장하고 처리할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은 인간이라면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상상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영원하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가변(可變)의 존재지만, 인류는 그 기억을 저장하고 또 원할 때 꺼내볼 수 있기를 꿈꿨다. 그래서 기억을 지우고, 되찾고, 저장해 옮겨놓는 소재는 SF 장르는 물론, 모든 드라마나 영화, 소설의 단골이기도 하다.

기술 발전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려내고 있는 '블랙미러'의 에피소드 중 '당신의 모든 순간'에서는 기억을 영상으로 완벽하게 저장하고 되돌려 보거나 남들에게 보여줄 수도 있는 사회가 구현된다. 귀 뒤쪽에 작은 칩 하나를 이식하는 방법으로 눈은 카메라 렌즈처럼 대상을 그대로 포착하고 기록하는 용도로 쓰인다. 이 세계에서 더이상 기억은 사적이고 가변적인 의식의 일부가 아닌 그야말로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또 다른 에피소드인 '돌아올게'에서는 불의의 사고로 연인을 잃은 주인공이 사람의 기억을 데이터로 하는 인공지능 로봇과 대면한다. 로봇은 세상을 떠난 연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설정돼 있기 때문에 똑같은 모습, 똑같은 버릇, 함께 공유한 추억까지 나눌 수 있는 존재다.

두 에피소드 모두 기억을 저장하고 옮겨놓거나 지울 수도 있고, 그것을 활용해 영원하지 않은 존재를 불멸의 존재로까지 만들면서 혼란을 겪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 이러한 기술의 발달은 어쩌면 혜택 같아 보이기도 하고 족쇄처럼 보이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보존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힘을 갖는 일이다.

하지만 혹자는 인간이 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망각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는 시대는 어느새 코앞에 와있다.

인간의 뇌 구조를 모방해 만든 '뉴로모픽(Neuromorphic·뇌신경모방) 반도체'는 대용량의 데이터를 인간의 신경망 구조와 같이 병렬 처리해 아주 작은 전력으로도 복잡한 연산이나, 추론, 학습 등을 할 수 있게 만든 기술이다.

최근 드론이나 자율주행, IoT(사물인터넷), AI(인공지능), 음성인식 등 우리 생활에 편리함을 더해주는 다양한 4차 산업혁명 분야에 폭넓게 활용되고 있으며 차세대 기술로서 국가 간 개발 경쟁 또한 치열하다. 실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도 뉴로모픽 반도체를 미래 기술로 정하고 세계 유수의 연구진과 협업해 뉴로모픽 반도체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해외에서는 컴퓨터와 두뇌를 직접 연결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뇌신경과학 스타트업 '뉴럴링크'에서는 '신경 레이스(neural lace)'라고 부르는 기술을 개발한다. 생각을 업로드하고 다운로드할 수 있는 작은 전극을 뇌에 이식하는 것이 목표다. 그동안 동물의 뇌 속에 칩을 삽입하는 등 실험을 해온 뉴럴링크는 지난해 10월 뇌에 컴퓨터 칩을 심은 원숭이가 물리적인 조작 없이 머릿속 생각만으로 비디오 게임을 하는 실험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임상시험 책임자 채용 공고를 내는 등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 준비 단계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이처럼 인간은 방대한 지식과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데이터를 한 번에 저장하고 처리하는 기술은 과학과 산업 분야를 넘어 의학, 교육 등 전 분야에 걸쳐 인류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가능성이 크다. 알츠하이머와 같은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자료의 수집과 처리 분류와 같은 기계적인 업무로부터 벗어나 조금 더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변형되고 왜곡되고, 사라지는 기억에 대한 가치를 붙잡아야 할까.

아니면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과 정보와 지식에 대한 손실 없는 대혁명의 시대를 기쁜 마음으로 맞이해야 하는 걸까.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시기이다.

곽지혜 기자 jihye.kwa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