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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아프리카에서 붙잡혀 미국으로 노예로 끌려온 조상 '쿤타킨테'를 추적한 알레스 헤일리는 소설 '뿌리'에서 '그리오(Griot)'라는 존재를 만난 경험을 이렇게 적고 있다. "늙은 그리오는 여기까지 거의 두 시간이 걸려서 이야기했는데, (…) 「네 명의 아들 가운데 첫째인 쿤타는 나무를 베러 가려고 마을을 벗어났는데……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의 피는 얼어붙는 듯싶었다. 아프리카의 오지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 노인은 (…)자기 이름은 '킨-테이'라고 항상 고집했으며, 기타를 '코'라고 불렀으며, (…) 북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다가 납치되어 노예가 되었다는 한 아프리카 인에 관한 이야기를 (…) 자신의 입으로 되풀이 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 턱이 없었다." '그리오(Griot)'는 전통 현악기 '코라'를 연주하며, 마을의 역사를 구술(口述)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오' 덕분에 알렉스 헤일리는 자신의 조상 '쿤타킨테'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오'가 사라진다면, 그 마을의 역사도 사라진다. 얼마 전 아시아문화전당 1층 상설전시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마나스치(Manaschi)'라는 놀라운 존재에 대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마나스치'는 키르키스스탄의 '그리오'다. 키르키스스탄의 '마나스치'들이 암송하여 들려주는 이야기는 중앙아시아 초원의 대서사시로 평가받아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3부작 서사시인 '마나스'다. '마나스'는 키르키스인들의 민족영웅 '마나스'와 그의 아들 손자, 3대에 걸친 이른바 영웅서사시다. 만들어진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4,000년전 만들어진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에 비하면 최근작이다. 놀라운 것은 2,000 행의 '길가메시 서사시'가 점토판에 새겨져 후대에 전해진 것과는 달리, 50만 행이 넘는 '마나스'가 대대로 이어진 '마나스치'들의 암송(暗誦)을 통하여 구전(口傳)으로 이어져왔다는 사실이다. 50만행을 암송으로 전승했다는 사실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문화적 자부심과 사명감, 각고의 노력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50만행에 달하는 내용에 역사적 사실과 함께 키르키스인들의 삶 면면이 담겨 있다는 문화적 가치보다도 '마나스치'의 존재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전시회장에 걸린 '마나스치'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거대한 영웅으로 다가왔다. 문자가 없는 민족들이 문화적으로 미개하리라는 편견은 '마나스'와 '마나스치'들에 의한 전승 앞에서 힘을 잃는다. 구전 전승의 힘은 키르키스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아리랑도 구전의 힘이 전승에 강력하게 작용했다. '아리랑'이 지방마다 다른 버전(version)이 존재하고, 같은 지방에서도 가사가 다른 아리랑이 많이 채록되는 것은 구전 전승이 갖고 있는 힘 때문이었다. 문자로 정해진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부르는 이에 따라서 내용이 달라지는 놀라운 창의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오'들의 역사 구술과 '마나스치'의 '마나스' 암송과는 또 다른 문화적 힘이었다. 문자는 언어가 완전한 골격을 갖추고, 높은 수준에 도달한 뒤에야 탄생한다. 조악한 언어문화가 문자를 탄생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문자 없이도 언어문화는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각 민족이 처한 문화적 환경에 따라서 문자는 언어문화에 비해 얼마든지 훨씬 못 미치는 수준으로 등장할 수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문자화된 '마나스'의 내용이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5·18의 역사는 온전히 문자의 힘으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독재정권의 강압 속에서 문자는 언어보다 결코 더 큰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늘의 기록들은 구술 증언의 이어짐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시아문화전당은 '마나스치'라는 위대한 문화의 힘을 만날 기회를 제공했다. 우리는 그 앞에 서야 하고, 고민해야 한다. 오랫동안 인류는 키르키스스탄의 '마나스치'와 같은 존재들에 의해 문화를 이어왔다. 문자는 옆에서 거든 것뿐이다. 현 시대는 문자와 이미지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문화는 의존적 존재들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전시장을 찾아 우리 모두가 한국 문화의 '마나스치'가 되겠다는 결심을 해보기를 권한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