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6년 3월 남도예술회관에서 진행된 광주 MBC \'별이 빛나는 밤에\' 제6회 \'별밤가족 발표회\'에서 참가자들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필자 제공 |
1973년 서울 종로 2가에 DJ 고(故) 이종환이 이끄는, 통기타의 메카로 알려진 쉘브루 라이브 홀에 출연하는 가수들을 통칭 '이종환 사단'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당시 인기 DJ였던 광주 MBC 별밤지기 소수옥이 진행, 이장순과 필자인 국소남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면서 빛고을 광주에 '소수옥 사단'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광주에 통기타 붐이 시작됐고, 광주 포크음악의 서막이 열렸다. 1973년 쉘부르의 이종환 사단보다 몇개월 앞선 광주에서 소수옥 사단이 먼저 탄생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 탄생
별밤은 MBC FM의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1963년 3월 17일 청소년을 위한 심야토크 프로그램으로 시작해 6년간 오남열 아나운서가 진행했다. 1969년 3월 17일 명사들을 초대, 대담 프로그램 형식으로 1년간 차인태 아나운서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어 1970년 음악감상실 인기 DJ였던 이종환씨가 진행을 맡은 후 심야음악프로그램으로 정착, 현재까지 47년 넘게 방송되고 있다.
이종환에 이어 박원웅, 조영남, 이필원, 김기덕, 이수만, 서세원, 이문세, 옥주현, 박경림, 윤하 등이 계보를 이어갔고, 현재 강타가 진행을 맡고 있다. 특히 1985~1996년까지 진행을 맡았던 이문세는 '밤의 교육부 장관'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별밤'이란 타이틀은 1963년 당시 장명호 PD 등 프로그램 제작진이 방송 아이디어를 기획하던 중 남산 위 밤하늘의 별을 보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광주문화방송은 1964년 3월 4일 한국문화방송 광주국으로 개국, 현재 AM 81.9KHZ, 표준 FM 93.9MHZ, FM 4U 91.5, 95.1MHZ로 광주ㆍ전남지역과 전북 일부지역을 가청권으로 방송되고 있다. 광주 MBC의 '별밤'은 1972년 최초 지역 자체 제작으로 소수옥이 진행을 맡아 방송이 시작됐다.
●이장순과 월남에서 만나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장순과의 첫 만남은 전쟁터인 월남이었다. 이장순은 광주 31사단 문화선전대에 복무 중 1969년에 월남에 파병됐고, 파병시에 더블백 보다는 통기타를 먼저 챙겨간 통기타쟁이 창병이었다. 필자는 이듬해 월남행 수송전함에 올라타게 되고, 그해 늦은 봄 이장순을 만나게 됐다.
필자는 A.I.U(특수정보부대)소속으로 맹호기갑연대에 파견 근무중이었고, 이장순 역시 맹호기갑연대 아래 2대대 군수보급병으로 근무중이었다.
정보장교를 모시고 2대대 순찰도중 지하 벙커에서 누군가가 기타를 치며 팝송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이장순이었다. 출신지가 같은 동향에 팝송을 곧잘 부르는 친구를 만난 것이다.
그해 12월 21일 필자는 정보활동을 마치고 귀대하던 중 베트공의 침공을 받고 총상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갔고, 이장순은 다음날 국소남의 생사를 확인도 못한 채 귀국길에 오른다. 서로 연락처도 모른 채 헤어지게 된 것이다.
●광주서 운명적 만남
1971년 3월 31일 제대 후 요양차 일본을 다녀온 후 오랫만에 고향 광주에 들러 충장로 1가 옛 집을 찾았다. 월남땅에서 죽지않고 살아 돌아와 탯자리에 서서 어린날의 추억에 한참을 잠겼다. 커피 생각에 금남로 2가에 위치한 관광호텔 커피숍에 막 들어가려던 순간, 10m전방에 낯익은 얼굴의 사나이가 보였다. 7개월 전 월남에서 나의 생사를 모른 채 먼저 귀국했던 이장순이었다. 그도 나를 즉시 알아봤고 두 사람은 영화의 주인공들인양 뜨거운 포옹을 했다.
월남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국소남이 살아서 이장순 앞에 있었다. 나 또한 그와의 만남이 믿겨지지 않았다. 월남의 전쟁터에 이어 고향 광주에서 국소남과 이장순의 또 한번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그날이 1971년 6월 25일이었다.
●두 남자, 통기타에 매달리다
며칠이 지나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된 국소남과 이장순은 기타와 노래에만 매달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서대문 현저동에, 이장순은 불광동 지나 연신내 누나집에서 며칠씩 밤을 새며 노래와 기타에만 몰두했다. 주로 연신내 가게에서 연습을 했다. 필자의 집에서 노래할 땐 마음이 편치 않았서다. 누나가 국내에서 잘 알려진 소프라노 가수였기에 혹여 '딴따라'라는 말이라도 들으면 어쩌나 하고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후일 누나는 통기타 치고 노래하는 것도 예술의 하나인데, 마음 내키면 네 뜻대로 해보라고 말했었다. 누나와 필자는 한살 터울이다. 누나는 정통 음악을 전공했다. 필자 역시 누구못지 않은 음악성을 가졌노라 자부했지만 결국 통기타와 친해진 초라한 딴따라 정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아 누나와의 음악적 교감이 서로 멀어진다고 느꼈던 때다.
초등학생때부터 같이 노래하고 음악을 들으며, 긴 세월을 함께 했는데, 누나는 유명한 김자경 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 역을 따냈고, 후일 미국 유명 대학의 스칼라 쉽을 받아 유학길에 오른다. 그런 누나를 바라보던 필자는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이장순의 집안 형제들은 달랐다. 우선 연신내쪽에 살고 있는 큰누나, 작은 누나, 바로 위의 형이 이장순이 노래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또한 적극적이었다. 이장순은 광주 조선대학 병설 전문대학을 나와 전공 대신 노래와 기타에 빠져 있었지만 형제들은 그의 처지를 이해하는 듯 했다.
●OB's cabin 라이브 무대에 충격
필자와 이장순은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하루종일 기타와 노래에 미쳐 있었다. 팝송 책 한권을 구입하면 1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섭렵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죽기살기식으로 통기타에만 매달렸다. 시간이 나면 명동에 자주 나갔는데, 주로 'OB's cabin'에서 음악을 많이 들었다. 당시 가장 잘 나가고 품격있는 가수나 연극인들의 출연이 많은 무대의 술집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작곡가이자 연주인인 김희갑을 비롯해 김도향, 손창철의 '투 코리언즈', 정훈희, 최희준 등 기라성 같은 연주인들의 무대가 타 업소와는 격이 다른 그런 곳이었다.
어느날 밤 이장순과 명동의 'OB's cabin'에 갔다가 라이브 무대를 보고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그날 밤을 잊을수가 없다. 충격적인 무대를 본 것이다.
김희갑의 클래식 기타 연주는 감미롭고 일품이었다. 충격을 받았던 건 다음 '투 코리언즈'의 무대였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그들의 노래는 나의 음악적 상식을 깨뜨렸다, 평소 경음악으로 자주 들었던 'The Platters'의 'Red Sails in the Sunset-황혼에 붉은 돛을 달고' 라는 노래를 듣고서였다.
그들이 통기타를 매고 나온 것도 아니었다. 감미롭고 서정적인 가사의 노래이긴 하지만 재즈적 스윙 템포의 리듬감이 있는 노래를 밴드에 맞춰 부르는데, 그만 넋이 나가버렸다. 특히 간주부분의 에드리브. 손창철의 하이톤이 순간 내 귀와 뇌까지 지배해버린 순간이었다. '그래, 노래는 저렇게 해야돼, 듀엣도 저렇게 불러야 돼'라며 그날 밤의 감동은 후일 내 무대에서의 노래, 스타일, 선곡에까지 변화를 줬던 게 사실이다.
이장순과 나는 거의 매일 저녁이면 명동이나 종로에 나가 음악듣기를 즐겨했다. 'OB's cabin' 그리고 '디쉐네' 무교동의 '쎄시봉'은 음악에 미쳐있는 이장순과 나의 감상적 음악의 요람이 되기도 했다. 음악은 젊은 두 남자의 세월을 그렇게 훔쳐갔다. 통기타 가수ㆍ문화공연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