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담길 풍경 되새김 길 제주내륙에서의 올레 마지막 코스는 해녀 박물관을 등지고 제주해녀항일운동 기념공원을 가로지르면서 시작된다. 다른 코스에 비해 거리가 짧은 편이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뭔가 아쉬우면서도 특별하게 여기지는 길이다. 그래서일까. 해뜨기 전의 거친 바람까지 소중하게 생각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나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옛 봉화대가 있었다는 나지막한 연대동산으로 가볍게 들어섰다. 마을과 밭길, 바닷길, 그리고 오름이 각각 N분의 1씩 차지한다. 군살 없는 볼거리들로 오목조목 조합되어 있다. 워밍업을 하듯 연대동산을 지나서 면수동의 옛 이름인 '낯물'에 있는 밭길이라는 뜻의 '낯물밭길'로 들어선다. 겨울이어도 노란 무꽃과 유채꽃이 커다란 꽃다발처럼 밭 가득 피어 있어 밭담길은 흡사 계절이 실종된 풍경화처럼 화사하다. 무엇보다도 바람이 만들어놓은 구름이 광활한 하...
편집에디터2022.02.10 16:51해녀벽화. 차노휘 바람의 길 제주올레 마무리 여행을 떠났다. 2020년 연말에 시작했으니 거의 1년 넘게 걸었던 셈이다. 일하면서 짬짬이 시간을 냈기에 일상의 활력소 같은 걸음이었다. 제주도 내에서 걷는 코스가 1부터 21코스라면(7-1, 14-1 포함 총 23코스) 제주도 부속 섬인 우도(1-1), 가파도(10-1), 추자도(18-1)를 더하면 총 26코스가 된다. 도상거리 425m이다. 빈번하게 다니다보니 조력자 역할을 하는 분들이 생기기도 했다. 제주도 모 고등학교 모 회 동창회 모임 회원들이다. 친교로 일주일마다 걷기를 하는 단체인데 몇 년 전 영실에 함께 다녀온 뒤부터 인연이 되어 간혹 제주도로 떠나기 전, 코로나 상황의 제주도 소식을 전해 듣거나 날짜가 맞으면 함께 걷기도 했다. 이번 김녕서포구에서 시작하는 올레도 함께 했다. 마침 일요일이라 내 코스에 맞춰주었다는 ...
편집에디터2022.01.27 17:26너븐숭이4·3기념관 내부. 차노휘 이야기 다섯 - 너븐숭이4·3기념관 올레19코스는 제주 항일운동의 현장인 조천만세동산에서 시작된다. 장엄하게 서 있는 추모탑과 운동기념탑 뒤쪽 밭길을 걷다보면 해안도로가 나온다. 해안도로는 곧 조천포구 길목에 있는 관곶과 만나게 되고 관곶은 넓은 백사장이 있는 신흥해수욕장까지 연결된다. 신흥리 마을길을 지나면 드디어 함덕서우봉해변에 닿는다. 도심과 가까운 함덕해변은 사계절 내내 관광객들에게 사랑을 받는 곳이다. 곱고 흰 모래사장이 바다 멀리까지 뻗어 있고 에메랄드빛 바다는 서우봉(111.3m)을 감싸면서 먼 바다로 이어진다. 살찐 물소가 뭍으로 기어 올라오는 듯한 모양새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름에 해수욕을 즐겼다면 겨울에는 해변을 등 뒤로 하면서 하이킹하는 것도 좋다. 약간의 오르막길과 숲 사이로 난 길은 2003년부터 2년 동안 동네 이...
편집에디터2022.01.13 17:33제주도의 밤 이야기 넷- 제주도의 밤이 무르 익어가는 시간 밤이 되면서 비바람이 연신 낮은 지붕을 쓸고 가는 소리가 거세진다. 동네 어귀에 있는 헐벗은 당산나무가 둔하게 몸을 비튼다. 뒷마당에 걸쳐진 이중 빨랫줄이 거센 바람에 겨워 윙윙 소리 내 운다. 눈보라 치는 제주도의 시골 밤은 일찍 내리고 오밀조밀 게스트하우스 거실에 모인 객들은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인데도 오랫동안 함께 해온 것처럼 그들이 겪었던 '무용담'을 늘어놓기에 바쁘다.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는 일반 단층 주택을 개조했다. 방 세 개가 복도를 중심으로 마주보고 있다. 2인실이 기본인데 한 사람 당 3만원을 받는다. 조식 포함이다. 주인 남자가 직접 요리한 음식이 개인 쟁반에 밥과 반찬 몇 가지로 아주 깔끔하게 제공된다. 30대 중반의 키 큰 미남형 주인은 서울에서 이주해온 이주민이며 신혼이다. 신혼집은...
편집에디터2021.12.30 16:07닭모루 언덕에 있는 전망대(정자). 차노휘 닭 머리 닮은 바위. 차노휘 이야기 셋 – 북두칠성의 맥과 제주인의 기상이 살아 있는 땅 기(奇)씨는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걸을 때마다 비단 치맛자락이 사각거렸다. 며칠 전에 황제가 선물한 옥 귀걸이가 양쪽 귀에서 찰랑거렸다. 옥 귀걸이를 걸었다고 시샘한 제1황후에게 매질까지 당했다. 비록 매질과 욕을 먹었다지만 고려에 있었으면 꿈도 꿔보지 못할 사치였다. 그녀는 미천한 집안의 태생이었다. 그녀의 부모가 원나라에 바칠 공녀(貢女)로 그녀를 내놓았다. 1333년 8월 그녀는 원나라에 끌려왔다. 살아남아야했다. 다행히 다른 처녀들보다 미모가 빼어나 눈에 띄었다. 고려출신 환관의 도움으로 혜종 황제에게 차를 따르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 일을 맡은 게 천운이었다. 운에만 의지할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
편집에디터2021.12.16 18:33곤을동. 이야기 둘 – 이덕구, 곤을동, 제주4·3항쟁 "살려주세요, 아저씨, 살려주…." 다섯 살 소년이 경찰 발치에 쭈그리고 앉아서 덜덜 떨고 있었다. 소년 뒤로 그의 어머니인 듯한 여자와 두 살짜리 계집아이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경찰은 겁에 질려 울고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있는 산으로 달아나라, 그러면 살려주마." 소년은 일어섰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고 어느 사이 오줌을 지렸는지 바짓가랑이가 다 젖어 있었다. 한 발짝을 겨우 떼어 경찰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담장 너머에서 시퍼렇게 겁에 질린 주민 몇이 훔쳐보고 있었다. 소년이 막 대문을 나서려고 할 때 총소리가 울렸다. 총탄을 등에 맞은 소년이 고꾸라졌다. 별도봉을 지나 제주 4·3 당시 초토화되어 터만 남아 있는, 곤을동에 도착했다....
편집에디터2021.12.02 15:19산지천. 차노휘 18번 코스는 제주 시내 한복판에 있는 간세라운지에서 시작하여 사라봉정상(망양정), 곤을동 4·3유적지, 화북포구, 삼양검은모래해변, 불탑사, 신촌포구, 연북정을 거쳐 조천만세동산에서 끝난다. 나는 이 코스를 세 번에 걸쳐 천천히 걷기로 한다. 빠른 내 발걸음이지만 이야깃거리가 많은 이 길이 나를 붙들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른 아침 편의점 덱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마실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커피를 다 마신 인부차림의 남자가 지나가면서 말을 남겼다. "예전에는 이곳이 엄청 부자 동네였어요. 요즈음은 다들 바닷가로 나가니 구도시가 되었죠. 명맥만 '제주시 중앙로'라는 명칭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옛날에 장남에게는 중산간 밭을 주고 차남에게는 해변가 검멀레를 주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뒤바뀌었죠, 뭐." 남자의 말 때문일까. 급할 것 없는 걷기인데 마음은 어서 걷고...
편집에디터2021.11.18 15:4016코스 단애산책로 바람 따라 걷는 제16코스 제주올레를 만들면서 롤모델로 삼았던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을 걷다보면 몇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다. 800km 정도 되는 거리를 한 번에 완주하려는 사람(거의 한 달 걸린다)과 걷고 싶은 구간만 걷거나 시간이 날 때마다 걸어서 완주하려는 순례자이다. 후자인 경우는 지리적 접근성이 좋은 유럽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시도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휴가를 걷는 데에 기꺼이 투자한다. 나또한 제주 올레를 걸을 때 지리적 접근성의 용이함(?)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코스를 이어나갔다. 2020년 12월 30일부터 2021년 1월 4일까지 제1차 걷기를 시작으로 2월 5일부터 2월 15일까지는 제2차, 제3차는 10월 1일부터 10월 3일까지였다. 아직 완주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나는 올레를 걷고 있는 셈이다. 그...
편집에디터2021.11.04 15:29한담산책로. 차노휘 1) 올레에 대한 믿음 15번 코스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한림항에서 중산간을 거쳐서 고내포구로 가는 A코스(16.5km)와 서해바다를 끼고 고내까지 가는 B코스(13km)이다. 나는 두 길 모두 걸었다. 짧은 기간 안에 올레 스탬프 완주만을 목적에 둔다면 한 군데만 가면 된다. 이미 두 군데를 걸어본 나는 어느 한 곳도 지나칠 수 없었다. 또한 올레에 대한 믿음 때문이기도 하다. 그 믿음이란 그 지역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을 선택해서 기꺼이 도보여행자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배려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 중산간으로 가는 A코스를 걸을 때는 내내 비가 왔다. 비는 풍경을 더욱 생생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늘 배낭 속에서 자리를 차지하던 우비의 존재감을 드러내준다. 배신도 있다. 방수가 된다는 신발이 그 역할을 다 하지 못...
편집에디터2021.10.21 16:28영실에서 윗세오름 가는 길. 차노휘 1) 영실에서 윗세오름까지 설문대할망에게 오백 명의 아들이 있었다. 할망은 어느 날 아들들을 위해서 큰 가마솥에 죽을 끓이고 있었다. 워낙 솥이 커서 나무 주걱을 크게 휘젓는다는 것이 부뚜막에 손을 짚고 중심을 잡고 있던 팔목을 쳐버렸다. 그만 할망이 솥에 빠져버렸다. 일을 하고 돌아온 아들들은 여느 때보다 더 죽을 맛있게 먹었다. 마지막에 귀가한 막내는 솥에 남은 뼈를 보고는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다. 막내는 어머니의 고기를 먹은 형들과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었다. 차귀도로 가서 바위가 되어버렸다. 뒤늦게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형들은 한라산 영실로 올라가서 돌이 되었다. 형들이 돌이 된 그곳을 영실 기암, 즉 '오백장군' 혹은 '오백나한'이라고 부른다. 올레를 걷다보면 이색적인 풍광뿐만 아니라 독특한 전설도 많이 접한다. 그 중에서 한라산과...
편집에디터2021.10.07 14:59오설록 녹차밭. 차노휘 1) 제주어 올레를 걷다보면 낯선 지명을 자주 접하게 된다. 14코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저지예술정보화 마을에서 4,4km를 걷다보면 큰소낭숲길이 나온다. '낭'은 나무의 제주어로 제주올레에서 길을 개척하면서 새롭게 붙인 이름이다. 큰소나무숲길을 따라 4km를 더 가면 돌멩이들과 이름 모를 잡초들로 어울려진, 구불구불한 돌담으로 구획된 길을 만날 수 있다. 오시록헌 농로이다. '오시록'은 호젓하고 비밀스럽게 숨어 있다는 뜻의 제주어이다. 농로를 따라 걷다보면 14코스의 아늑한 비경인 '굴렁진 숲길(움푹 패인 지형을 제주어로 '굴렁지다'라고 한다)'로 들어서게 된다. 지명도 낯설지만 그 풍경 또한 새롭다. 바닷가를 노닐다보면 막 물질을 끝낸 해녀들이 그녀들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외부인이 뭔가 물어보면 산뜻한 표준어로 답변을 해준다. 이들은 ...
편집에디터2021.09.23 16:45밭담길. 차노휘 1) 사람들의 정성이 모여 만들어진 길 오늘도 나는 다시 걷는다. 발에 착 감기는 신발 밑창으로 흙을 밟으면 종아리와 허벅지 안쪽 근육이 당겨진다. 양팔이 자연스럽게 흔들리면 머리는 수많은 생각들로 술렁거린다. 마침내 묵어있던 것들이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온 몸은 박하사탕을 입안에 넣은 것처럼 환해진다. 한줄기 땀이 목덜미를 따라 등골로 흐르면 뺨은 붉게 물든다. 이마를 훔치는 한줌의 소금기 품은 바람,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잘 마른 생선 같은 고슬고슬한 햇살… 내 발걸음은 용수리 돌담길에서 시작해서 중산간 숲길로 향한다. 마침내 올레 26코스 절반인 13코스에 들어선 것이다. 2007년 9월, 시흥리의 작은 초등학교에 삼삼오오 등산화를 신은 사람들이 모여서 발걸음을 뗀 것이 제주올레의 시작이었고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닦아놓은 그 길 위에 내...
편집에디터2021.09.09 15:55전망대가 보이는 풍경. 차노휘 코로나시국의 여행은 귀국하고 나서도 자가격리가 끝나야 완전히 끝났다고 할 수가 있다. 각 나라마다 방역검사도 다르다. 존에프케네디공항에 없는 것이 인천공항에는 있었다. 일명 K방역이었다. 인천공항에서의 K방역은 철저했다. 비행기에서 공항 건물로 진입했을 때 제일 먼저 맞닥뜨린 것은 바리게이트처럼 통로를 막은 방역관리사였다. 귀국 72시간 안에 뉴욕에서 받은 PCR 음성 판정 서류와 여행 전 접종했던 백신 확인증을 제출해야 했다. 뉴욕으로 떠나기 17일 전인 6월 10일에 얀센 백신을 맞았다. 17일이라는 숫자를 강조하는 것은, 백신을 접종하고 항체가 생긴다는 2주 후에 출국해야 귀국했을 때 자가격리면제 대상이라는 방침 때문이다. 두 가지 서류를 꼼꼼하게 살피던 방역관리사는 여권 표지에 방역확인증과 자가격리면제라는 스티커를 붙여주었다. 면제자는 공항...
편집에디터2021.08.26 16:33바셀. 차노휘 맨해튼 거리를 걷다보면 무료 코로나 검사 부스를 종종 본다. 나도 검사를 한번 받아볼까 하다가 검사 받고 기다리는 그 초조한 시간이 싫어서 그냥 지나치곤 했다. 사람이 많은 타임스 스퀘어 같은 곳에는 부스 두 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자연사 박물관 내에서는 백신 접종 부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코로나와 관련된 부스를 발견할 때마다 기록 삼아 사진을 찍어 두었다. 부스를 확대해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부스 운영 홈페이지 주소를 발견했다. 검색해보니 유료인 CtiyMD와 달리 어떤 코로나 검사도 무료이다. 친절하게 센터 몇 군데 주소와 영업시간까지 적어 두었다. 이곳에서 검사받고 안전 귀국한 한국 사람들이 꽤 있다는 블로그 소개글이 있었다. 뉴욕은 다양한 얼굴이 상존한다. 예약하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은 의료 센터가 있는가 하면 전액이 무료인 곳이 있다. 주거지 또한 원룸...
편집에디터2021.08.12 15:28이스트리버 너머 맨해튼이 보이는 루스벨트아일랜드. 차노휘 7월 5일 뉴욕시티에서 살인 사건 발생. 60대 브루클린에 사는 남자가 노숙자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선행을 베풀었으나 노숙자에게 살해당함. 위와 같은 살인 및 총기 사고에 관한 뉴스를 심심찮게 이곳에서 접할 수가 있다. 올버니에서 2주 머물렀을 때 한국 식당에서 불고기 비빔밥을 먹고 숙소로 걸어오다가 영업을 하지 않은 식당 벽면에 특이한 벽화가 있어서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지나가는 사람이 전날 그곳에서 '슈팅'이 있었다고 말한다. 콘크리트 정글과 같은 맨해튼의 분산함과 달리 올버니는 뉴욕 주 수도라고 하지만 전원에 둘러싸인 작은 소도시에 오래된 유럽풍 건축물이 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이런 곳 또한 총기 사고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슈팅이 있었다는 그곳을 굳이 나누자면 올버니에서 아웃사이더 구역이었다. 분수대 너...
편집에디터2021.07.29 1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