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창·조재호>어른 김장하는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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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창·조재호>어른 김장하는 어디에나 있다
조재호 월계초 교사
  • 입력 : 2025. 04.27(일) 14:10
조재호 월계초 교사
동료 교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학교 축제를 하고 수익금이 남았고, 이를 학급운영비로 사용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담임교사는 사용처를 아이들이 직접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피자를 사먹자”, “치킨을 먹자”는 등의 의견이 오갔지만, 결국 아이들은 “그냥 현금으로 나누자”고 결정했습니다. 교사는 “그래, 그렇게 하자”고 말했지만,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참 쓸쓸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마주한 느낌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사라지고, 계산만 정교해졌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이미 오래 전 ‘현금지불관계’의 차가운 그물망 속에 들어갔습니다. 공정하게 나눈 현금으로 어떤 아이는 치킨을, 어떤 아이는 피자를, 어떤 아이는 게임머니로 소비하겠지요. 겉보기엔 모두의 욕구가 채워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장면을 보며, 지금 우리가 처한 세계 전체가 이렇게 계산만 남는 세상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내란사태가 지속되고, 경제적으로는 무역분쟁 속에서 거대한 질서조차 발 밑에서 흔들리는 상황입니다. 을사조약 100년이 되는 올해, 우리가 사는 공간과 관계 모두가 다시 흔들리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모든 단단한 것이 대기 속으로 녹아버리는” 이 시대, 김장하 ‘신드롬’이라 불리는 현상은 우리들의 내면 깊이 새겨진 인간적 욕망이 표출된 것이라고 봅니다. 경남 진주시의 작은 한약방을 운영하던 김장하는 하동 지역의 가난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대가 없이 줍니다. 그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 훗날 사법시험을 합격합니다. 2025년 4월 4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판결을 내린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그 학생입니다. 윤석열 파면 선고는 단순한 법률적 선언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선물’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김장하 ‘어른’을 계속 떠올리게 되는 건 아닐까요? 감당하기 힘든 불안 속에서, 누군가의 꾸준하고 성실한 실천이 남겨준 조용한 확신 말입니다.

김장하 어른이 쌓아온 부가 가난한 학생 문형배에게 전해졌고, 그는 그 선물을 품에 안은 채 묵묵히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훗날 그는 헌법재판관이 되었고, 2019년 국회 청문회 자리에서 또렷하게 말했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고마워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나한테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아라’” 많은 이들이 이 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원래 인류는 타인에게 ‘주는 것’, 그리고 ‘받는 것’, ‘되갚는 것’으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그 흐름을 끊어내고, 모든 관계를 1:1의 현금지불로 환산하려 듭니다. 아이들이 각자 돈을 나누어 외로운 ‘소비’를 하는 장면 역시, 어쩌면 그 왜곡된 질서 속에 너무 익숙해진 우리 모습의 반영일지도 모릅니다.

김장하·문형배·탄핵 선고·한국 사회…로 이어지는 면밀한 흐름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안도감이 바로 김장하 신드롬의 본질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그 흐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김장하 ‘어른’을 추앙하면서도, “나는 돈이 없어서 기부를 못하는데 그 분은 참 위대한 분이다”라는 흐름은, 오히려 김장하 어른이 가리키는 ‘방향’을 놓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실은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무슨 대단한 용기를 보인 것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법리에 따른 일상을 실천했듯, 자기의 일을 성실히 하는 모든 사람들이 누군가에게는 ‘선물’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주민 중학생 이야기입니다. 이 학생은 베트남 엄마를 따라 한국에 온 지 3년째. 한국어 사용이 약간 미숙합니다. 그래서 보충학습을 받기로 합니다. 교사는 이 학생이 정말 대견하다고 생각되어 “너 정말 언어에 재능이 있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공부가 하기 싫은 학생은 어눌한 말투로 “매일매일 와야 해요?”라고 묻습니다. 그럼 혼자 오지 말고 “친구랑 와라”고 했더니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옵니다. 그 친구도 대견합니다. 매일 점심마다 간식을 얻어먹기 위해서만 친구를 따라오진 않았을 겁니다. 학생은 교사로부터 배움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교사에게 기쁨과 보람을 주기도 합니다. 교사는 어린 존재들이 주는 환대를 ‘현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학생의 얼굴에 김장하 선생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른 김장하는 어디에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