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들어온 나에게 아내가 말을 건넨다.
아내의 말 속에는 다급함이 없었지만 표정은 처연했다.
어디서 듣던 말이 생각났다. 나이 드신 분들이 고관절을 다치면 거동이 불편하여 결국 요양병원으로 가서 그곳에서 대부분 돌아가신다고. 나는 앞이 캄캄해졌다.
필자는 고향이 목포지만 40여년 전 경찰 초임지인 해남으로 발령받아 그곳에서 아내와 결혼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가정형편이 무척 어려웠던 시절이다.
고향에는 밑으로 동생들이 세명이나 있었지만 경제적인 여력이 없어 아내와 결혼하고도 경찰봉급을 고향 목포로 전부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2년 동안 아내는 남편의 월급 봉투를 한번도 구경하지 못했다.
우리의 신혼생활은 무척 힘들었다. 물론 내가 아니라 아내가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하루하루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고 견뎌준 아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장인, 장모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보리쌀 서말이면 처갓집 신세를 지지않는다는 말도 나에게는 사치스러운 말이었다.
결혼 초부터 장인, 장모님은 방세와 먹을 것을 대주었고 나는 기생충처럼 처갓집에 붙어 있었다.
장인, 장모님께서 우리집에 한번씩 들리시면 나 몰래 아내의 손에 용돈을 쥐어주고 가기도 했다.
용돈은 사위인 내가 줘야하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가슴아픈 얘기다.
나는 장인, 장모님을 친 부모처럼 생각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탓도 있지만, 장인, 장모님은 나를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많은 사랑을 주셨다.
그래서 나는 장인, 장모님이라는 호칭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아부지, 엄마였다.
두 분이 나이에 비해 지금처럼 건강하신 것은 두분의 복이지만 자식들의 복도 아닐 수 없다.
올해는 엄마가 구십이었다. 팔남매가 모두 모여 간단한 구순 잔치를 할 때 하루종일 함박 웃음을 짓던 엄마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아부지는 내년이 구십이다.
내년에도 아부지 구순잔치를 멋지게 하자고 약속했는데 고관절 골절이라는 사고에 팔남매는 비상이 걸렸다.
다행히 해남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고관절이 아니라고 했다. 불행중 다행이라는 말을 이럴 때 써야하나.
며칠후 바로 퇴원했고, 조심스럽게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니지만 나이가 있어 무척 힘들어 하신다. 계단을 오르기는 어려워 현관 앞 계단을 고쳐야 할 것 같다.
의자에서 일어날때도 세월의 무게만큼 힘들어 하신다. 옆에서 지켜보기가 안타깝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면 여름휴가라고 내려가면 우리 사위왔다고, 그 더운 날에도 암탉 어깨죽지를 양손에 끼어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쭈구리고 앉아서 닭털을 뽑던 모습도, 힘들게 농사지어 바리바리 보내는 식량과 반찬거리 속에 참기름 냄새만큼 고소했던 깊은 사랑도, 봉동계곡을 좋아한다고 자식들에게 좋은 자리를 줘야한다고 몇시간 전부터 자리를 선점하고 계시던 모습도, 김장철이면 자식들 고생한다고 새벽 칼바람 속에서 냉기를 뚫고 배추를 쪼개고 소금을 뿌려 미리 간해놓고 계시던 모습도, 방금 낳은 달걀을 깨서 참기름을 얹어 내 입안에 억지로 밀어넣던 엄마의 손길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그런 사랑을 어떻게 갚을까.
작년 봄에는 아부지가 원인 모르게 배가 많이 아팠다.
자식들은 걱정 속에 아부지가 돌아가시면 어디에 모실 것인지 타협까지 했다. 아부지는 선산을 원하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그래야 니가 자주 올거 아니냐. 그럼 내가 명선이 왔냐, 하면서 너를 반갑게 맞아줄게”라고 하신다 목소리는 건조하고 눈가는 촉촉하다
가슴이 먹먹하다.
언젠가는 닥칠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담벼락에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었다.
며칠후 아버지를 모시고 목포병원에 갔다.
가는 길은 험난했다. 난생처음 맞는 국지성 소나기는 마치 하늘이 열린 듯 차 지붕을 뚫겠다는 듯 무섭게 쏟아졌다. 차앞 시야는 3단 와이퍼가 무색할 정도였지만 무사히 목포병원에 도착하여 원인을 찾아 한달 가량을 입원치료하자 좋아지셨다. 빗길을 긴장하며 달리던 나를 보상이라도 하듯 감사드린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처지가 달라졌다고 변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절대로 변해서는 안될 것 중에 하나가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내리사랑만 있고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자식이나 손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크지만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옅어진다는 얘기일 것이다. 자식의 반만큼만 부모님께 하면 효자 말을 듣는다는 애기도 헛말이 아닐 것이다.
이제는 자식들과 영원히 작별할 시간들도, 살아오신 시간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기에 좋아하는 음식 들고 한번이라도 더 자주 찾아 뵙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 찾아 뵙고 음식을 맛있게 드실 때 옆에서 바라보면서 마치 세상의 효도를 나혼자 다한 것 처럼 착각 속에 살고있지만 아부지 아직은 강을 건너가시면 안됩니다. 팔남매의 무게를 이제는 내려놓으시고 지금처럼만 우리곁에 더 머물러 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오늘은 “아부지 토요일 완도가서 회 한번 먹읍시다”라고 전화라도 드려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