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갖지 않음이 아니라 넘침의 경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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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로드를 가다
무소유, 갖지 않음이 아니라 넘침의 경계라
법정스님의 무소유 순천 송광사 불일암
  • 입력 : 2016. 08.10(수) 00:00
법정스님이 1975년부터 1992년까지 17년간 머물렀던 불일암.
"앞으로 스님을 뵈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의 사촌 누이가 물었다. 현장 스님의 어머니였다. 2010년 3월9일, 열반 이틀 전이었다. "불일암으로 오십시요."

"불일암 어디로 갑니까?" 순천 송광사 매표소에서 물었다. "쭉 가다가 갈라지는 길 나올 때마다 왼쪽으로 가세요." 날은 35도 폭염에 오르막 산길이다. 숨이 턱 턱 막힌다. 물 한 모금이 간절하다. 불일암은 고려시대 승려 자정국사가 세워 자정암으로 불렸다. 한국전쟁의 손을 타면서 빈 암자로 퇴락했다가 스님이 중건하면서 편액을 내걸었다. 불일(佛日), '부처의 빛'이다. 텃밭 너머 축대 위 불일암이 이마를 드러낸다. 고요하나 적막하지 않고, 소박한데 가난하지 않아 청빈이랄까. 돌계단을 오른다.

'묵언'

작은 나무 판 글이 발길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막 핀 연꽃도, 키 큰 오동나무도 텃밭 고추도 말을 멈췄다. 작은 격자 창문을 빼꼼히 열었다. 삐~익~. 흠 흠~. 스님이 있었나 보다. 묵언에 주춤해 한 모금 갈증도 잊었다. 나무를 잘라 만든 탁자에 주전자와 물컵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물드세요.'

목마름을 미리 알았을까. 자그마한 글씨로 물을 권했다. '묵언'으로 '말'을 하고 있다. 나무로 만든 댓돌 위 하얀 고무신이 보인다. 생전에 스님이 신었단다. 스님은 그렇게 그대로 계셨다.



"행복은 결코 많고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간소함에 있다." -'홀로사는 즐거움' 중에서

1932년 해남 우수영 선창가 마을 선두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박재철,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 외아들로 자랐다. 숙부의 도움으로 겨우 학교를 다녔다. 우수영초등학교(27회)를 졸업한 뒤 6년제인 목포상업중학교(목포상고 전신), 전남대 상과대를 다녔다. 22살 청년은 고민했다. '본디 아무것도 없는데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3학년, 학교를 접었다. 1954년 그해 겨울 홀어머니를 두고 외아들은 산으로 갔다.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의 문하로 출가했다.

1960~70년대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며 한글 대장경 역경에 헌신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사전 편찬에 손을 보탰다. 초기 경전과 화엄경 번역에도 그가 있었다. 불교 대중화를 위한 13년 노고였다. 불교신문의 주필로 세상에 바름을 전했다. 박정희 독재체제에 맞섰다. 함석헌 선생과 함께 '씨알의 소리'도 발행했다. 장준하 선생과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 반 유신 대열에 동참했다. 모두 깨어있기를 바랐다.

인혁당 사건은 다시 산으로 이끌었다. 반 유신 투쟁을 벌이던 혁신계인사 8명이 사형을 당했다. 그것도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난 지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들은 2007ㆍ2008년 사법부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사법살인-.

홀연히 불일암에 몸을 맡겼다. 1975년 4월19일, 그날은 봄비가 내렸다.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적적한 암자에 비마저 내렸지만, 산꽃들을 벗 삼았다. 부엌에서 장작 몇 개를 가져와 의자를 만들었다. 스님이 만든 최초의 작품이었다. 의자는 지금도 그대로다. 다만, 스님 대신 작은 공책과 볼펜이 앉아 있다. 의자 위에는 스님의 사진이 있고, 옆에는 자그마한 통이 있다. 통 뚜껑에 글이 씌여 있다.

'사탕 드세요.'

스님은 여전히 베풀고 계신다.

回向, 일정기간 수행하며 선근(善根)과 공덕을 쌓으면 그것을 이제 다른 사람에게 돌리어 자타가 함께 깨달음의 성취를 기하는 것이다. 내 깨달음으로 다른 사람도 함께 깨친다는 게 회향정신일게다. 스님은 불일암에서 정진했다. 새벽 3시에 예불을 올렸다. 법구경 법문을 늘 경계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결국 그 녹이 점점 그 쇠를 먹는다' 산속에 은거하며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연과 불법의 깨달음은 한 달 한 번 글로, 한 권의 책으로 속세 중생들에게 전해졌다. 어찌 보면 회향이랄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친절입니다. 작은 친절과 따뜻한 몇 마디 말이 이 지구를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요." -2004년 하안거 결제 법문.(스님들이 여름 수행에 들어가기 전 말씀)



1976년 '무소유'를 세상에 던졌다. 법문도 난해한 교리서도 아니었다. 그저 산중 수행 1년의 모듬이었다. 박정희 개발시대, 땅 값이 10배씩 뛰는 시절, 욕망과 탐욕 덩어리 시대에 무소유의 울림은 크고도 넓었다. 지금도 여전하다. 33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무소유는 '본래무일물( 本來無一物)'에 닿아 있다. '본래 하나의 물건도 없다'라는 뜻으로,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마음 상태를 말한다.

스님은 평생 4가지만을 소유했다고 한다. 당장 읽을 몇 권의 책, 한 모금의 차, 음악을 듣기 위한 낡은 라디오, 몇 평의 텃밭이었다. 그는 가지는 것을 거추장스러워 했다. 자자한 명성도 베스트셀러 인세도 소유하지 않았다. 그가 쓴 20여권의 수필집은 모두 베스트셀러로 인세만도 수십 억 원에 달했다. 인세는 가난한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쓰여졌다. 스님은 광주 충장로 음악감상실 베토벤에 늘 장학금을 놓아두었다. 무소유는 갖지 않음이 아니라 넘침의 경계였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불일암을 다시 둘러본다. 수돗가와 의자 몇 개와 탁자, 댓돌에 놓인 하얀 고무신, 고추와 푸성귀가 자라는 텃밭, 장작으로 만든 의자, 두 칸짜리 작은 집과 해우소, 몸을 씻었던 움막 같은 공간이 전부다. 스님이 있고 없음이 다르지 않다. 그 흔한 스님 기념물도 없다. 엽서만한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을 뿐.

遷化, 이승의 교화를 마치고 다른 세상의 교화로 옮긴다는 뜻이다. 1992년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 칩거했다. 유명세로 번잡해서다. 2004년에는 그동안 맡았던 길상사 회주직도 내놓았다. 세속의 모든 명리와 절연했다. 2010년 들어 스님의 병세는 위중했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 그해 3월11일, 세수 79세, 법랍 56세 입적.

관도, 수의도 없이 그저 가사 한 벌에 몸을 가리고 화마를 받아들였다.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生也一片浮雲氣 死也一片浮雲滅),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쓰러지는 것이라 했는가. 스님은 1975년부터 1992년까지 17년간 머물렀던 불일암에 여전히 계신다. 손수 만든 의자 앞 후박나무에 몸을 눕혔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어디 있는가. 모두 한 때 일 뿐, 그러나 그 한 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버리고 떠나기' 중에서



옷깃을 잡는다. 바람이다. 사탕 하나 드시게, 생은 순간의 한때이니 순간마다 열심히 사시게…. 예, 법정스님! 합장. 이건상기획취재본부장gslee@jnilbo.com

[ 이 취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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