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존' 묻혔던 충효동은 분청사기 가마터 지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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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어존' 묻혔던 충효동은 분청사기 가마터 지존이었다
[남도 도자, 천년혼 다시 빚자] <2> 분청사기 '조선시대 새로운 트렌드'
무등산 자락 15~16세기 관요터
학계 "백자로 가는 과정 보여줘"
한글 문양 '어존'은 국내 유일
  • 입력 : 2015. 06.19(금) 00:00
\'어존\'이 새겨진 분청사기귀얄문마상배.
우리나라 도자기의 역사는 크게 14세기 후반 청자시대를 거쳐 16세기 이후 백자시대로 나뉜다. 하지만 조선 초기 도공들은 청자에서 벗어난 새로운 도자기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 낸 조선의 '미'가 바로 '분청사기'다.

당시 고려청자가 화려하고 귀족적인 느낌이었다면 조선시대 분청사기는 소박한 멋이 큰 특징이다. 분청사기는 원래 분장회청사기(紛粧灰靑沙器)의 줄임말로 태토나 유약은 청자와 비슷하나 장식을 위해 그릇 표면에 백토를 짙게 바른 것을 말한다. 분청사기가 대개 우윳빛의 낯빛을 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세기 전 분청사기 빛을 보다

조선시대 분청사기가 학계에 조명을 받은 것 반세기 전 쯤이다. 지난 1963년 광주 북구 충효동에서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조선 최고의 분청사기 생산지가 발견되면서다.

이번 발굴은 국립박물관 최초의 가마터 발굴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발굴을 통해 훗날 2호 가마라 부르게 될 유적의 일부가 확인됐고 충효동 일원이 1964년 국가지정 사적 제141호로 지정됐다.

발견된 가마터는 길이 20m, 폭 1.5m 규모로 가마벽과 연통, 불을 지피는 화구 등이 완벽하게 남아있었다. 당시 가마 굴뚝이 남은 상태로 발견된 최초 사례로 학계에 보고되기도 했다.

퇴적층에서는 다양한 장식 기법의 분청사기와 백자 등이 발견됐다. 20여종에 이르는 다양한 명문(銘文) 자기는 분청사기제작과 관련한 제작지나 납품 관서명, 제작시기를 밝힐 수 있는 우리나라 도자 역사의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았다. 학계에서는 "충효동이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 넘어가는 과정을 말해주고 있다"고 표현했다. 또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어존'이라는 한글이 새겨진 '분청사기 마상배'가 출토돼 당시 한글 사용의 실상을 보여줬다.

발굴 역사상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의 신기원을 이룬 광주 충효동은 이후 관련 연구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했다. 일부에서는 15세기 한국분청사기 연구의 기준점이 된다고까지 평가됐다.

●15세기 호황 누린 분청사기

분청사기는 이 땅에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백자는 조선 세종 때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게 통설. 백자는 그릇 빛이 거의 투명에 가까운 순백색인데 단단해 실용성도 높았다. 백자의 담백함과 새로운 도자기 유행에 맞춰 소비가 늘었다. 하지만 초기 백자는 값이 비싸 왕실에서나 겨우 사용하는 정도였다. 이 때 등장한 게 분청사기이다. 충효동 분청사기도 이 무렵인 15세기에 호황을 누렸다.

당시 광주 충효동 가마는 왕실이나 중앙기관에 납품하던 관요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파편 중 '무진내섬(茂珍內贍)'이란 글귀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글귀 중 '무진'은 조선 초엽인 1430년부터 1451년까지 사용된 광주의 명칭으로 충효동 가마가 운영되던 시기를 보여준다. 동시에 '내섬'은 궁궐에서 음식 등을 맡아보던 관서인 내섬시를 일컫는 말이다. 15세기 광주에서 제작된 분청사기가 서해의 바닷길을 타고 한양의 궁궐로 운송됐음을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분청사기 관요는 광주 충효동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시기 경상도와 충청도의 관요 유적에서도 다량의 분청사기가 출토됐다. 이들 지역 분청사기의 명문은 납품받던 관청 이름이 주를 이룬다. 반면 충효동 분청사기에서는 제작시기, 분청사기가 광주의 대표적 공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글귀, 그리고 제작 장인들의 성이나 이름 등 다양한 명문이 확인된다.

●무등산 전시실 등 갖춰져

충효동 분청사기의 역사와 의미는 가마터에 자리 잡은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에서 한눈에 볼 수 있다. 1998년 개관한 전시실은 충장사 또는 광주호수생태원에서 풍암제로 오르는 길목인 금곡마을에 있다. 전시실 내부엔 1991년 발굴 당시 수습한 분청사기와 제작도구, 관련유물 등 2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그 옆 가마 보호각에서는 분청사기의 제작과정을 좀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길이 20여m의 가마는 산비탈면을 따라 기울어진 모습이다. 마치 거대한 굴뚝이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느낌이다.

가마는 덮개를 제외하고 15~16세기 도자기 제작소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마 아궁이에 해당하는 봉통부는 방금 불을 지핀 듯이 검댕이 묻어 있고 중간쯤엔 완성된 분청사기를 가마에서 꺼내다만 흔적도 보인다. 가마 바닥의 푸릇한 이끼가 없다면 600년 전의 것이라고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글ㆍ사진=김성수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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