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창·추교준>벌레가 된 ‘그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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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창·추교준>벌레가 된 ‘그 남자들’?
추교준 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장
  • 입력 : 2025. 06.22(일) 15:07
추교준 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장
“그레고르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커다란 벌레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카프카의 ‘변신’은 이렇게 시작된다.

처음에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갑작스러운 변신을 보며 당황스러워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당혹감의 정체는 또렷해진다. 그것은 바로 그레고르가 ‘더 이상 돈을 벌어올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의 진짜 공포는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보다 가족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에 있다. 생각해 보면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한 직후에도 ‘벌레’는 아니었다.

여동생 그레테는 자신의 오빠를 위해 헌신적으로 음식을 챙겨주고 방도 청소해 주었다. 그랬던 그레테가 시간이 흐르면서 생계를 위해 온갖 일을 겪은 뒤에 마침내 “우리 가족은 저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울부짖었고, 결국 그레고르는 완전한 벌레가 되어버린다.

“현재 고등학생인 아들의 주변 모든 남자아이가, 정말 거짓말 안 하고 단 한 명도 안 빼고, 100% 윤석열을 지지하며 신남성연대(극우 유튜버)를 추종한다.”

지난 1월, ‘내 아들을 ‘극우 유튜브’세계에서 구출해 왔다’를 쓴 권정민 교수의 글 중 일부이다.

학교 교실에서 극우화는 일상이다. 남학생들의 극우화 현상을 기획한 기사에 따르면 “동성 친구들 사이에서는 ‘게이 XX’, ‘너 페미지?’, ‘너 빨갱이냐?’ 같은 표현을, 악의가 담긴 욕으로 쓰기보다는 친구끼리의 장난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교실 안의 폭력은 광장의 폭력으로 이어진다. 자기들끼리 온라인 커뮤니티에 모여 시시덕거리던 ‘일베’가 2014년 9월 6일, 광화문 세월호 단식 투쟁 농성장 앞에서 온갖 음식들을 쌓아놓고 ‘폭식투쟁’을 하면서부터 세상 밖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로부터 10년 후, 젊은 남성들은 12·3 불법 계엄 이후 광장 곳곳에서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고 외치다가 급기야 ‘서부지법’에 쳐들어가서 온갖 집기를 부수고 난동을 부렸다.

21대 대선 투표에 참여한 20대 남성들 중 약 70%가 내란을 옹호하며 부정선거를 이야기 하는 정치인과 약자를 조롱하고 대국민 성폭력 발언을 일삼는 정치인에게 표를 던졌다.

얼핏 보면, 이 사회에 ‘벌레’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헌정질서를 파괴한 세력을 옹호하고 다양성과 통합을 부정하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위협하는 해충으로 보인다. 이들이 앞으로 만들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끔찍하다. 10년 전 일베가 10년 후에는 법원을 공격했다. 앞으로 10년 후에는 또 어떤 일들을 벌일까? 이렇게 생각하면 12·3 내란의 정치적 종식을 이룬 지금도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불안한 것이 전부일까? 그들은 정말 앞으로 일어날 문제의 원인일까? 오히려 여러 문제로 인한 어떤 징후(symptom)가 아닐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얽히고 얽히며 쌓이고 쌓이다가 사방으로 터져나온 어떤 결과가 아닐까. 그레고르가 느닷없이 벌레로 변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견디고 버티다가 자기를 잃어버린 결과로 벌레가 되었듯이, 젊은 남성들을 둘러싼 여러 내·외적 환경들이 그들로 하여금 극우적 사고를 내면화 하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 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가족들에게 건네는 말이 한낱 해충의 기괴한 소음이었듯이. 이땅의 젊은 남성들이 외치는 목소리가 광장에서는 혐오와 차별로 들리는 것이 아닐까.

‘펨코만 보면서 이준석 선택? 이걸 읽어보세요’(2025, 6, 5,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남학생들은 발달상 여학생들에게 뒤쳐지기 마련이다. 장난을 치다가 여교사로부터 지적과 질책을 받기 일쑤다. 언짢은 기분을 환기하기 위해 학교를 벗어나면 스마트폰 게임에 접속한다. 캐릭터를 키우고 경쟁을 해서 이기고 지는 서열 구조에 몰입한다. 게임 속 세계야말로 공정한 세상이다. 이렇게 공정한 곳이라면 능력주의도 동의가 된다. 게다가 게임 속 익명성은 그동안 억눌렸던 조롱과 혐오를 가감없이 내뱉을 수 있는 창구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온갖 혐오 표현이 한낱 장난과 놀이로 소비된다. 그렇게 지내다가 나이가 들어 현실로 돌아와보니, 그동안 억눌렸던 생각과 감정을 가감없이 대변해주는 유튜버들이나 정치인들이 보인다. 그들의 자극적인 갈등의 언어는, 자신들이 듣기에 공정하다. 내로남불하지 않는다. 눈치보지 않는다. 그간의 억울함과 분노를 알아준다. 속이 다 시원하다.

사실 ‘변신’의 진짜 비극은 그레고르의 변신이 아니라 그레테의 변신이다.

‘오빠’를 돌보던 그레테가 그토록 차갑게 변하지 않았더라면 그레고르는 그렇게 벌레로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응원봉이 빛나던 지난 광장 이후, 우리에게는 오빠를 돌보던 ‘처음의 그레테’가 필요하다.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극우화된 젊은 남성들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 앞서 말한 권정민 교수의 ‘극단주의에 빠지지 않는 아이로 키우기’ 유튜브 영상을 보고 생각해 보자. ‘극우 대해부’와 같은 주간지의 기획 연재 기사나, 극우 현상을 분석한 ‘광장 이후’와 같은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자.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함께 모여 읽고 생각하며,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기꺼이 말 건네는 동료가 되자. 이땅에서 모두 함께 인간으로, 시민으로 살기 위해 그렇게 변하지 않는 ‘처음의 그레테’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