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윤석열정권 즉각퇴진·사회대개혁 광주비상행동의 7차 광주시민총궐기대회에서 시민들이 응원봉과 손팻말,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뉴시스 |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을 체포하는 것으로 응원봉 혁명이 일단락됐다.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성명을 발표해 우리를 지지했다. “미국은 한국 국민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한다. 법의 지배에 대한 우리 공동의 약속을 재확인하고, 한국과 한국 국민이 헌법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기울인 모든 노력에 감사한다.” 윤 수괴의 계엄령 선포와 의회의 해제 가결 이후 헌법적 절차대로 꾸준하게 진행되는 민주 질서 회복에 대한 지지 성명이다. 미국뿐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모토 삼는 세계의 여러 나라가 이른바 응원봉 혁명의 과정을 생중계하듯 지켜봤다. 이들이 주목했던 것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던 봉기나 혁명과는 분명하게 다른 한국의 특징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것을 K-culture의 한 현상으로 분석하는 중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K-정치라고나 할까. 그래서다. 이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을 자극해 국지전을 일으키고 이를 빌미로 계엄을 정당화하려 했던 일군의 세력들을 준엄하게 처단해야 한다고 본다. 내란 우두머리의 의도대로 남북 간 전쟁이 일어났다면 어쩔뻔했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관용을 베풀 수도 없는 내란죄, 나아가 천인공노할 외환 유치죄에 해당할 수 있다. K-culture 혹은 K-정치의 완성은 이 위난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해 경제와 문화의 회복을 이루는가에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목하는 것이 이른바 키세스혁명단이나 응원봉혁명단 따위의 재기발랄한 이름 붙이기이다. 엄동설한을 물리치고 밤샘 시위한 일군의 청년들에게 붙인 이름 인간 키세스는 Z세대다운 호명 방식이다. 물리학자 김상욱은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말했다. “은박 담요 혹은 스페이스 블랭킷은 말 그대로 우주에서 보온을 위해 미 항공우주국(NASA)이 개발한 것이다. 윤석열의 체포를 촉구하며 은박 담요를 뒤집어쓰고 눈을 맞으며 밤샘 농성을 한 이들은 ‘인간 키세스’라고 할만하다.” 이 풍경은 남태령대첩이라고 불리는 응원으로부터 이어졌다. 이를 1894년 12월 공주 우금치에 상경길이 막혔던 동학군에 비유하기도 했다. 격렬 시위도 아니고 투쟁 일변도의 저항도 아닌, 그저 춤추고 노래하는 듯한 풍경들의 출처 혹은 고향은 어디일까? 주지하듯이 K-pop이나 월드컵 혹은 올림픽 따위에서 학습된 익숙한 풍경이다. 선결제의 미덕과 나눔의 풍경을 더하니 세월호의 촛불로 연결되고 5·18코뮌으로 연결된다. 동기도 다르고 목적하는 것도 다르지만 이들 사이에 분명한 연결고리들이 있다. 한겨울 펼쳐진 난장, 특히 2~30대 청년들의 두드러진 참여에 감복해 눈물을 보이는 장년층들이 많았다. 전남대 박구용 교수는 이를 빛의 혁명이라 했다. 촛불혁명을 이은 응원봉혁명을 빛고을과 빛에 비유했다. 이러한 전통은 어쩌면 마한의 소도에서 오월 씨뿌리기를 마치고 발 구르며 춤추던 제천의례로 거슬러 오를 수 있다. 한국인들의 DNA에 흐르는 어떤 본질적 기질이라고나 할까. 오늘날 K-culture로 불리는 수많은 현상의 바탕에 있는 어떤 무엇, 사람들의 공명을 불러내는 울림의 요체, 이것이 인류가 당면한 여러 질곡을 풀어나갈 키워드가 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 시대가 가고 또 한 시대가 오고 있다는, 즉 지금 이 시대의 분기점이라는 점은 확실해 보이지만 그 출처나 내력의 거슬러 오르내림은 다함이 없이 무진(無盡)하다. 100년 전 혹은 200년 전 이 땅의 개벽을 위해 외치던 선지자들의 현현일까. 일군의 혁명가들에 의해 주창됐던 후천개벽 혹은 다시 개벽의 순간들일지도 모르겠다. 혁명이 꼭 많은 사람의 죽음을 동반하고 스펙터클하게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또 한 손에는 응원봉 들고 떼춤과 떼창에 기꺼이 참여하는 혁명을 확인하였다. 천지가 뒤흔들리지도 않고 남동풍이 몰아치지 않아도 싸목싸목 진행되는 이 혁명의 출처 혹은 내력을 찬찬히 주목하는 게 내 몫인 듯하다.
떼창혁명, 빛고을에서 K-culture까지
지금 외국인들이 생각하는 한국의 이미지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국 음식과 BTS를 필두로 하는 K-pop일 것이다. 통칭해 K-컬처라고 한다. 음식뿐 아니라 음악이나 영화 장르가 대표적 이미지로 떠오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불과 1세기 전 ‘고요한 아침의 나라’ 따위의 이미지로 한국이 소개된 것에 비하면 천양지차다. 이를 분석하거나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게 한국 미학 연구랄 수 있다. 한국의 아름다움에 관한 연구라고 해도 좋겠다. 물론 추학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중에서 내가 전공 삼아 연구해 온 게 남도의 아름다움에 관한 연구다. 나는 남도의 아름다움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고, 장차 동아시아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본 지면을 통해 판소리와 우리 소리를 말하고, 우리 방식으로 그려진 민화를 이야기하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역사로서의 설화(신화, 전설, 민담)를 이야기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담준론을 넘어, 민중의 몸짓과 언어, 생활 태도를 들어 그 안에 들어있는 오래된 생각과 철학을 끄집어내는 것이 요체다. 고매한 유학자나 철학자의 언설이 아니라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았던 민중들의 눈짓과 몸짓, 언어와 풍속 안에 스민 결 고운 생각들이 사실은 진정한 철학이요 종교이며 학문이라는 게 내 지론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랜 세월 투쟁과 교섭을 통해 쌓아온 시대정신이지 않겠는가.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주문했던 김대중 대통령의 유훈을 좌우명처럼 여기고 사는 이유도 그러하다. 명분과 진리를 탐구하고 섭리를 분석하는 현학을 늘 화두 삼아 정진하지만, 현실을 진단하고 설계하는 상인의 감각을 놓치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놓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즈음의 흐름을 떼춤의 법고창신 곧 떼창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앞사람을 따라 발을 구르며 떼로 춤추던 마한 소도의 의례로부터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떨쳐 일어나 노래했던 동학과 5·18의 빛고을까지, 아니 세월호의 촛불이 횃불이 되고 응원봉이 되었던 저간의 내력까지 상고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남도인문학팁
중구삭금(衆口鑠金), 향가 해가(海歌)와 마한 소도(蘇塗)의 떼창혁명
중구삭금은 뭇 사람의 말이 쇠도 녹인다는 뜻으로 여론의 힘을 얘기할 때 주로 인용하는 사자성어다. 초나라 굴원의 천문구장(天問九章) 석송(惜誦)에 나오는 노랫말이다. 대표적인 사례를 향가 ‘해가(海歌)’의 배경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강릉 태수 순정공이 아내와 함께 부임 길에 올랐다. 도중에 바다의 용이 나타나 아내 수로부인을 물속으로 끌고 가버렸다. 순정공에게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여러 사람이 하는 떼창이 쇠를 녹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불러모아 몽둥이로 언덕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십시오. 순정공이 그 말대로 노래를 짓고 사람들이 그 노래를 부르며 몽둥이로 언덕을 치니 놀란 용이 수로부인을 내놓았다.” 나는 이 풍경을 마한의 소도에서 행해지던 탁무(鐸舞)와 연결해 늘 상상하곤 한다. 노래도 춤도 여럿이 불러야 힘이 커진다. 몽둥이로 언덕을 치니 하늘과 땅과 바다가 공명했다. 떼창의 힘이 어디 동해의 용왕에만 미치겠는가. 이무기에도 못 미쳤던 계엄 우두머리 윤석열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장차 나랏일을 하려는 그 어떤 이들이라도 이같은 떼창혁명을 이길 수는 없다. 응원봉을 몽둥이 삼아 언덕을 두드리며 떼창을 하고 떼춤을 추는데 그 어떤 쇠라고 녹아나지 않겠는가. 향가의 해가와 마한의 소도까지 소급해 상상할 수 있는 떼창혁명의 현장을 Z세대의 재기발랄한 K-culture, 그 아름다움으로부터 확인하는 즐거움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