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마음… 광주와 남도의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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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마음… 광주와 남도의 원형
429. 옛이야기의 힘
  • 입력 : 2025. 01.09(목) 18:05
광주 무등산국립공원 서석대에 눈이 쌓여 있다. 무등산국립공원 제공
2024년 12월3일 오후 11시, 대통령 윤석열에 의해 위헌·위법한 계엄이 선포됐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10월 유신 이후 52년 만에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이자 내란이었다. 다행히 국회의 계엄해제 가결로 일단의 수습을 했지만, 온 국민 모두 가슴을 쓸어내린 시간이었다. 계엄해제에 대해 여러 분석이 있다. 그중에서도 발 빠르게 대처했던 국민들의 마음이 핵심이라는 게 중론이다. 전남대 박구용 교수는 이를 학습된 효과라고 말한다. 동학으로부터 5·18에 이르는 시민들의 학습과 경험이 일촉즉발의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십 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 페이지에 이 질문을 적어두었다 했다. 이후 5·18 당시 전남도청 옆 YWCA에 남아있다가 살해됐던 박용준의 마지막 문장을 읽게 되면서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한강에게 돈오(頓悟)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기왕의 질문을 뒤집어엎는 깨달음 말이다. 살고 싶었으나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소년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일반화해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개 승자들이 기록한 역사서술은 이긴 편의 내력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많다. 반면에 패자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승한 구전(口傳) 속에는 흔히 원형이라고들 표현하는 내밀한 정보들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전자를 쓰여진 역사라 하고 후자를 쓰여지지 아니한 역사라 한다. 쓰여지지 않고 드러나지 않으니 이를 원형에 빗대어 설명하곤 한다. 이번 계엄을 막은 시민들의 마음은 오랜 시간 학습되고 축적돼 온 어떤 마음들, 5·18 소년 박용준의 양심 같은 것이었다. 설화나 예술 따위의 장르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 안에 스며든 정신 혹은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한강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고 했다.



기록문학과 구비문학의 관계, ‘이야기학’의 무게

‘이야기학’이란 장르가 따로 논의된 것은 근자의 일로 보인다. 서사 구성을 갖는 이야기들을 모아서 논의해 보자는 소설론이나 문화콘텐츠학의 시도였다.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으므로 아직은 소수의 주장에 불과한 듯싶다. 이야기학은 설화를 비롯한 구비전승뿐 아니라 소설 등 현대문학을 포괄한다. 이를 명료하게 설명한 조동일의 견해가 ‘한국학의 진로(2014)’에 새겨져 있다. “문학은 말이기도 하고 글이기도 하다. 말인 구비문학과 글인 기록문학이 문학의 양면을 이룬다. 문학사는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의 관련사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구비문학 혁명이 1970년대 초 한국에서 일어났다. 문학관이나 문학사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으므로 혁명이라는 말이 지나치지 않다. 구비문학(oral literature)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고, 기록문학뿐 아니라 구비문학도 소중한 유산이므로 힘써 연구해야 한다는 곳이 적지 않다. 기록문학이 없는 아프리카 같은 데서는 구비문학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나 기록문학의 지배를 뒤엎어 기록문학과 구비문학은 대등하다고 선언하고, 문학사를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의 관련임을 명확하게 한 것은 전례가 없으며 한국에서 처음 이룩한 혁명이다.” 조동일은 이를 철학의 단계까지 끄집어 올린다. 문학이 구비문학에서 시작됐듯이 철학 또한 구비철학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이나 인도의 ‘베다’, 석가나 공자의 가르침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기록돼 경전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 방식으로 말하자면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 간 이 땅의 민중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승해 온 노래와 이야기 속에서 이 철학을 이야기할 수 있다. 조동일의 주장이 긴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구비문학에 대한 가치 평가와 문학적 위상 설정이 그것이다. 신동흔은 ‘스토리텔링 원론’(2018)에서 “이야기의 원형적 힘을 키운 팔 할이 구비전승이라는 과학적 메커니즘, 일컬어 휴먼 사이언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야기가 과학이라는 뜻이고 거기에 무의식적 원형이 있다는 얘기다. 수면 아래 숨은 마음, 예컨대 불법 계엄에 즉각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했던, 하지만 평소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마음들 말이다. 이게 어디 구비문학에만 그치겠는가. 신화, 전설, 민담 따위가 음으로 양으로 스며들어 도달한 곳이 사실은 한강의 소설임에랴.



남도인문학팁

광주의 힘, 남도의 힘, 아시아 신화 킬러콘텐츠

광주를 중심으로 아시아 신화 킬러콘텐츠 프로그램이 준비 중인 모양이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표방한 지 오래이니 어쩌면 너무 늦은 감이 있다. 킬러콘텐츠라는 말은 특정 미디어가 폭발적으로 보급되는 문화소라는 뜻이다. 이 콘텐츠를 내세워 여타의 장르들이 폭발적으로 일어서니 일종의 마중물이다. 광주는 많은 장르 중에서 왜 설화에 주목하게 됐을까? 옛이야기가 품은 마음 혹은 그에 새긴 정신 때문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의 가치가 생각보다 크다는 점은 조동일의 구비문학론에서 확인한 바와 같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데, 계엄 등 공동체적 위험에 노출됐을 때 순식간에 떨쳐 일어날 수 있었던 마음, 신동흔이 말했던 이야기의 과학적 원형 말이다. 예컨대 5·18 광주 코뮌은 어떤 마음들이 바탕이 되어 진행될 수 있었을까? ‘스스로 다스리는 공동체의 출현’이라고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했던 바탕에는, 프랑스 혁명기의 파리를 넘어서는 정신이 있었다고들 한다. 그래서 주장하는 게 광주 정신이다. 물론 남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내세우는 광주 정신은 인권, 민주, 5월 항쟁, 의로움, 개신교적 봉사, 남도 예술, 남도 문학 등 입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신화를 중심으로 하는 설화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이를 바탕삼는 프로젝트이니 아시아 각국의 설화를 수집해 비교하고 분석하는 일, 장차 예술 장르로 표현하는 일 등이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디지털 아카이빙 플랫폼은 기본일 것이고 학술 교류나 브랜드 공연도 진행될 터인데, 무엇보다 우선되는 것은 설화적 원형을 내세우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올해 전남도에서는 전남을 대표하는 브랜드 뮤지컬을 제작하기로 하였고(예상 제작비 60~70억원), ‘신시컴퍼니’에게 제작을 맡겼는데 원작을 조정 시인의 시집 ‘그라시재라’로 정했다. 어떤 역사적 사건도 아니고 어떤 영웅도 아닌 우리 이웃 아짐들의 수다로 전남의 대표성을 드러내겠다는 뜻이다. 그래서다. 만인의 주장을 다 들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누가 중심이 돼 논의를 풀어갈지 모르겠지만, 전남의 사례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듯싶다. 거론되는 광주 정신에 너무 경직되지 말라는 뜻이다. 광주와 남도의 원형적인 마음은 천편일률적으로 내세우는 영웅설화나 역사적 사건보다는 그 아래 드러나지 않은 어디쯤 있지 않을까. 특히 아시아문화중심을 표방하는 만큼 아시아인들이 공명하는 이야기를 찾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듯싶다. 설화 플랫폼을 기반으로 소설 등 이른바 이야기학 모두를 전제하면 콘텐츠 활용의 폭이 훨씬 넓어질 것이다. 조동일이 말한 세계 최초의 문학 혁명은 ‘구비문학대계’라는 국가 프로젝트를 통해 구현된 바 있다. 영상 시대를 맞은 지금 광주는 어떤 이야기 즉 문학 혁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광주의 힘을 믿는다. 남도의 저력을 믿는다. 현재를 구하고 어쩌면 미래까지 구할 수 있을 옛이야기의 힘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