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포권번 원경(죽동 132). 멀리 보이는 건물이 목포국악원(협회)터. 김희태 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제공 |
목포 최초 국악원을 연 강사 장월중선
장월중선이 한국전쟁의 포화를 피해 오갈치라는 섬으로 잠시 피난을 간 것이 1950년이다. 목포 인근의 섬이라는데 구체적으로 어딘지는 모르겠다. 광주와 전국 유랑에서 돌아와 목포에 정착하게 된 것은 남편 정우성이 목포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52년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어떤 기록에는 남편이 1955년에 위암으로 사망을 했다고 한다. 슬하에 정순임(1942~)과 정경호, 정경옥을 둔 처지라 살림이 막막해졌다. 그간의 명성을 살려 국악 강습을 해보고자 찾아간 것이 산정동 노인당이었다. 이때가 1952년이다. 노인당 방 한 칸을 빌려 그간 연마해왔던 다방면의 국악을 가르치게 된다.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최초의 목포국악 강습소 역할을 한 셈이다. 일부 기록에는 1955년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3년여의 격차를 두고 그 설립시기가 불분명한 것은 사설국악원과 공식적인 국악원의 개설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봐야한다. 장월중선이 세운 사설학원과 공식적인 국악원이 병존했다는 뜻이다.
예기조합과 권번에서 목포국악원까지
당시의 목포는 예기조합이 설립되어 일부 한량들에 의해 국악이 향유되고 있었다. 가야금과 춤의 달인인 무안사람 이대조와 판소리 명인 오수암 등이 회자된다. 하지만 예기조합만으로 예술적 수요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목포시지의 강난수가 쓴 기록에 의하면 1940년 7월 10일 죽동 132번지에서 목포권번을 설립하게 된다. 원장에 해남사람 김원희(당시 동아고무공업주식회사 전무)를 추대하고 북과 시가에 능했던 금종철을 총무로 선임해서 활동을 하게 된다.
해방이 되자 목포 예술계가 들썩이게 된다. 예술인들의 내부적 수요 못지않게 사회적 수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1947년에는 목포권번의 이름을 '악률사'로 개칭하고 원장에 김남기를, 국악강사로는 최막동을 선임한다. 한국동란이 발발하고 목포뿐만 아니라 남도의 예술계가 진통을 겪게 된다. 안중근전, 이준열사전, 유관순전 등 창작판소리 열사가를 지어 민족혼을 고무시키려했던 박동실이 월북하게 되면서 난기류가 형성된다. 장월중선을 포함한 남도 대부분의 소리꾼들이 박동실을 거쳐 가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전쟁 직후 내놓고 열사가를 가르치거나 말하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가야금의 명인 안기옥과 함께 월북한 사연이나 박석기에 대해서는 고를 달리하여 다룰 예정이다. 전쟁 후 혼란기를 거쳐 1953년에는 목포악률사를 '정악원'으로 개칭하고 목포시 대성동 노인당으로 옮겼다. 이때 원장이 조병무였고 안향련의 아버지인 광산사람 안기선이 강사로 초빙된다. 1955년 목포정악원을 죽동 노인당으로 옮기고 '목포국악원'으로 정식 인가를 받게 된다. 원장은 행남사 사장 김창훈이 맡고 장월중선이 강사를, 이인동이 교양부장을 맡아 국악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실질적인 목포국악원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목포국악원, 장월중선의 활동과 제자양성
목포에서 장월중선이 이룩한 성과는 셀 수 없이 많다.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녀가 시도한 창작음악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1957년에 만들었던 창극 '은하성(銀河城)의 달밤'은 4막 5장 구성의 노래극으로 우리 창극사의 전개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첫 제자로 알려져 있는 안향련을 비롯해 진도의 신영희, 오비연, 안애란, 오지오, 박계향, 박소연, 백인영 등 많은 제자들에게 판소리, 무용, 가야금, 아쟁, 연극, 농악 등을 가르쳤다.
목포 출신 박계향이 정명중학교를 다니다 보성의 정응민에게 소리공부를 하러 떠난 일화는 유명하다. 이동안(1906~1995)을 목포로 모셔다가 진쇠춤, 승전무, 심불로, 한량무, 태평무, 신칼 대신무 등 여러 가지 춤을 배운 것도 특기할 만하다. 목포를 포함한 남도지역 춤 전승의 전개과정을 볼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김일구가 장월중선에게서 배워 일명 김일구류라는 아쟁산조의 유파를 만들게 된 사연도 특이하다. 당시 장월중선의 동생이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는데 이 활대로 아쟁을 연주해보고 현재의 모양으로 개량하게 된 것이 동기다. 열사가를 지었던 박동실의 심청가를 가르치기도 했다. 월북인의 소리를 가르친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1981년 연좌제가 폐지되고 나서야 우후죽순으로 박동실제 판소리들이 거론되거나 복원된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목포국악원과 유달국악원의 활동들
1959년에는 목포국악원 임원을 개편한다. 원장에 강진사람 김현상을 강사에는 남원사람 강도근을 선임했고 강도근 이후에는 순천사람 박봉술을, 1960년부터는 보성사람 김상용을 강사로 초빙했다. 정응민의 제자였던 김상용은 이후 1973년까지 강사를 역임하며 목포국악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68년에는 유달노인당으로 이전하였다가 1975년에야 달성동 363번지에 새 건물을 짓고 입주한다. 유달노인당 시절에는 보성사람 조상현이 북과 소리를 가르쳤다. 남자판소리에는 조상현, 여자판소리에는 안향련이라고 할 만큼 당대 최고의 권위를 가졌던 이들이다. 1974년에는 진도사람 신영희가 강사를 맡았고 1975년에는 소리에 김흥남, 무용에 장복례를 선임하는 등 세를 확장하게 된다. 당시 장월중선은 따로 나와 유달국악원이란 이름으로 제자들을 양성했다. 장월중선이 목포생활을 한 것이 1952년부터 1962년까지 약 10여년인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룬 성과가 매우 크다는 점에 주목한다. 1962년 이후 장월중선은 광주, 곡성, 전주, 대구 등지를 거치면서 제자양성이나 국악공연에 헌신한다. 1963년에 경주와 인연을 맺고 1998년 타계할 때까지 정경옥, 주희, 김수미 등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게 된다. 경주 중심으로 판소리명가 장월중선 명창회를 개최하고 명창 장월중선 학술회도 개최하고 있지만 목포를 중심으로 한 남도지역에서는 거의 주목하지 못한 인물이기도 하다.
잊혀진 이름 목포의 장월중선
경주의 장월중선은 추모나 계승의 맥락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목포의 장월중선을 기억하거나 추모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이미 잊혀졌기 때문이다. 물론 하고많은 예인들 중에 장월중선 한 사람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술한 숱한 이름들을 있게 하거나 매개 역할을 한 예인이라는 점에서 상기의 의미가 크다 생각한다. 그녀의 딸 정순임 명창이나 고 안향련은 물론 신영희, 박계향 등 장월중선을 통해 성장한 이들이 많은 것도 환기의 이유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 예술계보다 목포 혹은 경주라는 지방에서 그 역할을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옛사람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성과도 중요하지만 그 성과 혹은 과오가 현재, 여기,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크기 때문이다. 전통음악 혹은 국악이라 호명하는 장르의 예술들이 오랫동안 고정되어 왔다는 생각은 오해다. 장월중선이 전통을 버무려 재창조하는 방법들을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다른 많은 공적들 중에서 바로 이점을 주목하는 것이 남도지역 후학들의 자세 아닐까 싶다. 해방공간과 민족 전쟁기를 넘어서면서 부침을 거듭했던 한국음악의 역사를 복원하거나 성찰하는 지점들을 환기시켜준 인물이라는 점에서 장월중선을 기억하는 의미를 되새겨본다.
남도인문학 TIP
1925년 4월 20일(음)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묘천리에서 장도순과 강인자 사이에 태어났다. 본명은 장순애(張順愛)다. 장월중선은 예명이다. 월중선이라는 호는 어머니 강씨와 아버지의 태몽과 관련이 있다. 선녀가 안고 있던 아기를 내주거나 하늘에서 달이 떨어져 품속에 안기는 꿈을 꾸고 태어났다 한다. 호는 예성(藝星), 부친 장도순(1892 ~1926)은 명창 장판개의 동생이다. 협률사, 장안사, 연흥사 무대에서 남도잡가를 잘 불러 한똑똑, 신만산포, 김일도, 조정렬, 조진영, 박경수, 김정문 등과 함께 일명 '8잡기꾼'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조부 장석중은 1915년 3월 26일 결성된 경성구파배우조합 일원이었다. 1903년 고종 7년 순릉참봉 벼슬을 받기도 했다. 혜릉참봉 벼슬을 받은 장판개뿐만 아니라 외아들 장연찬도 판소리에 조예가 깊었다. 안향련이 보성소리를 연마할 때 장연찬의 도움을 받았다고도 한다. 장판개의 수제자이자 당대 여류명창이던 배설향(1895~1938)이 장월중선의 큰어머니 격이고 가야금과 무용의 명인 장수향은 막내 고모다. 판소리, 가야금, 가야금병창, 거문고, 아쟁, 전통무 등에 두루 뛰어났다. 일찍부터 재능을 발휘하여 일제강점기부터 임방울 협률사를 비롯해 국극사, 조선창극단 등 창극단체와 여성국극협회, 임춘앵과 그 일행 등 여성국극단체에서 맹활약을 했다. 작곡, 안무는 물론 모든 면에서 예술적 기량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김일구류 아쟁산조를 배출할 만큼 창작능력도 뛰어났다. 춤에도 조예가 깊었고 새로운 창극도 만들어내고 필요한 작창도 손수 했다. 1967년 경주시립국악원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했다. 이후 신라국악예술단 창단을 했다. 1993년 경상북도 가야금병창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1995년 화관문화훈장, 1996년 동리대상(판소리부분)을 수상했다. 1998년 타계하였다. 무엇보다 최초의 목포국악원에 강사로 들어와 많은 인재를 길러낸 교육자이기도 하다. 38세 때 목포에서 경주로 거처를 옮겨 30여 년 동안 국악의 불모지라고도 할 수 있는 경주지역에서 국악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월북한 박동실제 판소리는 한애순, 장월중선에서 정순임으로 이어진다.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남도민속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