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산나무와 정자가 한데 어우러진 서작마을. 지금은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시야를 가리지만, 예전엔 전망이 정말 좋았다고 한다. |
정병호 어르신이 들려준 서작마을의 정월대보름 당산제 이야기다. 서작마을은 광주시 광산구 우산동에 속한다. 어르신은 서작마을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당산나무 쉼터에서 만난 몇몇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당산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당산제는 해마다 지냈다. 마을회의를 통해 화주와 제관을 뽑았다. 화주와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가려야 할 것이 많았다. 궂은일은 멀리해야 했다. 초상집에도 가지 않았다. 서로 화주를 맡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다. 이후엔 하릴없이 노인회원들이 맡았다.
비용은 마을 소유의 논을 빌려준 대가로 충당했다. 논을 팔아 마을회관을 지은 뒤로는, 회관 임대료로 충당했다. 당산제 비용은 큰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옛날처럼 돼지를 잡는 것도 아니고, 음식도 간소하게 준비하기 때문이다.
‘붕알전’으로 비용을 충당하던 때도 있었단다. 마을사람들이 곡식을 십시일반 모아 비용으로 썼는데, 남자들만 냈다. 하여, ‘붕알전’이다. 어르신들이 어렸을 때의 이야기라고 했다.
제사상을 받은 서작마을 팽나무는 당산 할아버지 나무다. 옛날엔 할머니 당산나무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베어버렸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서작과 동작은 본디 한 마을이었다. 당산제도 서작의 할아버지 나무와 동작의 할머니 나무에서 따로 지냈다. 마을의 공동우물도 함께 이용했다. 다만 제사 지내는 시간을 달리했다. 서작마을의 당산 할아버지 나무는 ‘고정자나무’로 불린다. 마을에 처음 들어온 장흥 고씨가 심었다고 이름 붙었다.
고정자나무에 전해지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어느 날 마을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이 소 한 마리를 훔쳐 끌고 가는데, 나무 주변만 빙빙 돌았다. 도둑은 발을 동동 굴렸지만, 마을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동이 트고, 때마침 논으로 향하던 마을사람한테 붙잡혔다. 사람들은 당산나무가 소도둑을 잡아줬다고 믿었다.
다른 얘기도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한테 놋그릇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을사람들이 나무 아래에다 놋그릇을 숨겨 무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전쟁 때 죽은 사람이 없었던 것도 당산나무가 돌봤다는 얘기도 있다. 당산나무의 나뭇잎이 한꺼번에 피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는 얘기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당산나무 아래에 쉼터가 있다. 이른바 ‘고정자’다. 지금은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시야를 가리지만, 예전엔 전망이 정말 좋았다. 무등산도 훤히, 가까이 보였다.
“옛날엔 초가 세 칸짜리 정자였어. 대나무를 엮어 마루를 만들었지. 동네사람들이 다 함께 이엉을 엮고, 지붕도 올렸어. 집집마다 나와 울력으로 했어. 마을 어르신들의 쉼터였지. 우리는 그때 어려서, 얼씬도 못했어. 주변에서 소를 많이 키웠고, 소를 매어두기도 했는디. 논밭에서 일하다가 오신 어르신들은 쉬면서 막걸리도 한 잔씩 허고. 지나가는 지게꾼이나 리어커꾼도 쉬어가곤 했는디. 그때는….”
정병호 어르신의 회고다. 어르신은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추억 속의 풍경으로만 남았다. 마을의 공동우물도 벌써 수십 년 전에 없어졌다. 1970년대 이후 새마을사업과 토지정리, 도시개발 등으로 모두 사라졌다. 마을 앞으로 흐르던 개울도 덮여 도로가 됐다.
![]() 도심 속 마을 안길. 발걸음을 옮기면 옛 마을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
서작마을의 노거수는 잉계마을에 있다. 대광아파트 로제비앙과 광산교회 사이다. 잉계(孕鷄)마을은 지형이 소의 생김새를 닮았다는 우산동에서도 오래된 마을이다. 암탉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조선 초기에 장흥 고씨가 처음 들어와 정착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극추가 옮겨오면서 마을이 커졌다. 옛 지명에 ‘들개’, ‘배나드리’가 있는 것으로 미뤄 큰 포구가 있었다. 서작과 동작으로 나뉜 것도 지역이 넓고 사람들이 많아서였다.
마을사람들은 넓은 농지에서 벼농사를 주로 지었다. 수리시설이 좋아 수확량도 많았다. 큰물이 나도 안전했다. 다른 마을에서 부러워하는 부자마을이었다. 근대에는 수박, 참외를 많이 재배했다. 가을엔 무를 많이 심으며 도시근교 농업을 해왔다.
부자가 많고, 부자마을이었지만, 집집마다 대문이나 울타리가 거의 없었다. 있더라도 장식용이 대부분이었다. 도둑이 없는 마을로도 유명했다.
1980년대 중반 대규모 택지 개발이 이뤄지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상무신도심과 연결되는 80m 도로를 타고 업무지원 시설이 많이 들어서고, 차량 통행도 크게 늘었다. 자연스레 상공업이 발달했다. 원예단지와 화훼단지는 아직 건재하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