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왜 죽은 아이를 오쟁이에 담아 장례를 치루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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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왜 죽은 아이를 오쟁이에 담아 장례를 치루었을까?
384)오쟁이쌈
“현대에 이르러 주검을 너무 허투루 다루는 게 아닌가 성찰해야만 한다. 엄연한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되겠지만, 전통을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 입력 : 2024. 02.22(목) 14:17
씨오쟁이-인병선, 짚공예-전통문화, (월간전통문화사, 1986, 1월호, 91쪽) 발췌
표준국어대사전에 제시된 오쟁이 그림
토종벌통 옆에 걸린 씨오쟁이-전통문화(월간 전통문화사, 1987, 3월호)에서 발췌
부모는 죽은 아이를 안고 커다란 슬픔으로 울부짖는다. 무슨 악귀가 달라붙어서 어린 목숨을 앗아갔느냐고 소리친다. 아들이건 딸이건 자식은 똑같으며 오늘 아침 숨을 거둔 첫아이 시체 위의 하얀 이불이 눈물로 젖어 있다. 모든 식구들은 아직 시체 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보이지 않는 악귀를 두려워하면서도 죽이고 싶은 마음이다. 이 악귀가 또다시 태어나는 아기를 잡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솜씨 있는 이웃에게 오쟁이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이쁘게 엮어와서 뜰 위에 놓아두었다. 아기 어머니는 깨끗한 보자기로 시체를 싸서 오쟁이를 잡고 있는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그 속에 넣는다. 오쟁이 자루를 어깨에 멘 남편이 집을 나선다. 모든 식구들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있다. 오쟁이는 마을을 벗어나 한참을 걸어서 산으로 올라가는 그의 등과 옆구리에서 뒹굴다가 초장골 커다란 소나무 밑에서 땅에 내려졌다. 그러고 나서 담배를 피울 동안 기다렸다가 높은 소나무 가지에 매달렸다. 그 높이는 땅에 서서 닿을 정도로부터 제법 높은 곳까지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상관없으나 그는 위험스럽게도 매우 높은 가지에 오쟁이를 매달고 내려왔다. 그리고는 땀을 닦으면서 죽은 아기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그곳에는 아기를 데려간 악귀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저 시체는 오쟁이와 함께 썩을 것이며 그동안 사나운 날짐승들이 찾아와 쪼아 먹으면 나쁜 귀신도 쪼아 먹혀서 다시는 아기를 데리고 가지 않을 것으로 믿고 아기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온다.



‘오쟁이쌈’에 대한 보고



진도문화원에서 펴낸 격월간지 『예향진도』 제15호, 1987년 3~4월호 2페이지에 소개된 내용이다. 이 글의 서두에는 이 같은 상황이 발생한 내력을 밝히고 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940년대까지라고 했다. 또 이러한 장속(葬俗)이 진도군 전역에서 확인된다고 했다. 진도의 사례만 있는 게 아니다. “전라남도 장성군 삼서면에서 만난 김분이 할머니는 자신도 어려서 들은 얘긴데, 전엔 더러 갓난아이가 죽으면 오쟁에 담아 소나무에 걸쳐 놓았다고 한다. 특히 전염병이 유행할 때 이렇게 했는데 그것은 병귀에게 시신을 공물로 바침으로써 더 이상 전염병이 돌지 않도록 하기 위한 예방책이었다. 같은 생각에서 유추됐을 것으로 짐작되는 몇 가지 민속이 최근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가령 열병에 걸리면 짚으로 오쟁이를 만들어 그 속에 조밥을 정성스럽게 지어 담아 나무에 걸쳐 놓으면 낫는다고 믿는 것이랄지, 정월 열나흗날 밤 오쟁이에 모래나 자갈을 담고 그 위에 동전 몇 닢을 얹어 다리 위에 갖다 놓으면 그해의 액운이 다 물러간다고 믿었던 것 등이 그것이다.” 당시 이 풍속을 소개한 기자가 해석한 것은 널리 알려진 속신(俗信)에 대한 것이다. 사실 제보된 대보름 풍속에서 주목할 것은 이 기능이 사실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금전을 재배부하는 메커니즘이라는 점에 있다. 다시 진도의 보고로 돌아온다. 대상은 대개 3세 미만의 어린아이다. 오쟁이쌈을 한 장소를 초장(草葬)골, 추장(媨葬)골 혹은 추장(媨葬)터라고 한다. 초장은 초분(草墳)과 같은 말이고 추장 또한 진도지역에서 상용해온 용어다. 초분골이나 오쟁이쌈을 하는 공간에 추할 추(媨)자를 쓰는 것은 초분을 하는 일정한 공간을 일상 공간과 구분하여 기피하는 공간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을 당산나무와 초분골을 동일한 보전(保全)의 메커니즘으로 읽고 신성의 원리와 기피의 원리로 해석한 바 있다. 높은 소나무 가지에 오쟁이를 매단 목적은 새에게 쪼아 먹히게 하기 위함이다. 천장(天葬) 혹은 조장(鳥葬)이라고 하는 티벳이나 몽골지역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조장(鳥葬)을 이렇게 설명한다. “송장을 들에 내다 놓아 새가 파먹게 하던 원시적인 장사(葬事), 예전에 중국의 남쪽 지방에 있던 풍속이다.” 하지만 중국 남쪽뿐만이 아니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초분 문화권 전역의 풍장(風葬)이었을 것으로 나는 추정하고 있다. 이 또한 기회를 보아 차차 소개한다. 풍장은 초분과 연결된다. 오쟁이쌈은 풍장의 여러 갈래 중 하나이다. 바꾸어 말하면 초분의 한 갈래라고 정의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명사화된 오쟁이쌈이란 명칭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지는 알 수 없다. ‘오쟁이쌈’은 오쟁이로 시신을 싸맸다는 뜻으로 당시 예향진도 편집인이던 박주언씨가 붙인 이름이다. 내가 졸저 『산자와 죽은자를 위한 축제』(민속원)에서 밝혔던 것은 왜 죽은 아이를 오쟁이에 담아 장례를 치루었을까에 대한 해석이었다. 이 장례가 단순히 의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무형의 재생 관념이 깃든, 그러니까 보다 내밀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었다.



남도인문학팁

오쟁이와 씨오쟁의 비밀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는 ‘짚으로 만든 작은 섬’이다. 강원 지역에서는 ‘오재기’라 하고 경남 지역에서는 ‘오장치’라 한다. 오장치는 삼태기의 방언이라고 하므로 삼태기와 비슷하게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진도에서 ‘메꼬리’라 부르는 ‘멱둥구미’도 거의 유사한 형태로 볼 수 있다. 혹은 망태기라고도 한다. ‘섬’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좀 작은 크기라고 보면 된다. ‘섬’은 곡식 따위를 담기 위해 짚으로 엮어 만든 그릇으로 주로 수확한 벼를 담는 데 쓰였다. ‘나락 한 섬’, ‘겉보리 한 섬’ 등의 용례가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겉곡식 그릇 중 대표적이라고나 할까? 한 되는 한 홉의 열 배이고 한 말은 한 되의 열 배이며, 한 섬은 한 말의 열 배이니 약 180리터 규모와 크기에 해당한다. ‘섬 틈에 오쟁이 끼겠나’라는 속담이 있다. 볏섬을 쌓아두고 그 사이사이에 또 오쟁이까지 끼워 욕심을 부리냐는 힐난 외에, 오쟁이가 섬보다 좀 작은 크기라는 정보까지 들어 있다. 위키백과에서는 짚으로 만든 작은 섬(바구니)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작은 보자기나 주머니에 물건을 넣는 형태를 통틀어 오쟁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대개 20~30cm 정도의 작은 섬(이 경우 대개 바구니 혹은 가방으로 묘사한다)모양으로 생겼으며 지역에 따라 여러 용도로 사용된다는 설명이 덧붙여진다. 하지만 정작 주목할 것은 오쟁이의 대표적인 것이 씨오쟁이라는 점이다. 씨오쟁이는 씨앗을 담아 두는 짚으로 엮은 물건을 말한다. ‘종다래끼’라고도 한다. ‘죽어도 씨오쟁이는 베고 죽는다’는 오쟁이가 바로 그것이다. 흔히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씨오쟁이를 베고 죽는다고 한다. 설령 자기가 굶어 죽을지언정 씨를 담은 오쟁이를 남긴다는 뜻으로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닭이 달걀을 낳는 ‘닭둥구미’와도 비슷해서, 졸저에서는 닭과 달걀의 부화로 해석한 바도 있다. 애틋한 부모의 심정을 씨오쟁이와 닭둥구미에 담아내는 심정으로 오쟁이쌈이란 장례를 치루었다는 내 해석인 셈이다. 앞서 장성의 사례를 소개한 기자의 해석처럼 병귀에게 아이의 시신을 공물로 바치고 더이상 전염병이 돌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을까? 내 해석처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씨오쟁이에 담아 장차 더욱 소중한 어떤 생명으로 발아(發芽)하고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기 위함이었을까? 물론 일반적인 해석은 전자의 것이다. 심지어 처녀가 죽으면 네거리에 거꾸로 매장하는 풍속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풍속의 이면을 부정적으로만 다루거나 미신처럼 대할 필요가 없다. 다시 소개할 ‘엄가시발쌈’에서 이를 설명하겠다. 현대에 이르러 주검을 너무 허투루 다루는 게 아닌가 성찰해야만 한다. 엄연한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되겠지만, 전통을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생명’은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원리다.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