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전일칼럼>‘바보 노무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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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전일칼럼>‘바보 노무현’이 그립다
이용환 논설실장
  • 입력 : 2023. 08.27(일) 17:05
이용환 논설실장
영하까지 떨어지는 매서운 날씨였지만 광주 옛 전남도청 앞을 가득 채운 시민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밤 늦게까지 TV를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이 금남로로 몰려나와 민주당의 승리를 축하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외쳤다. 노사모 회원들이 노란 손수건과 목도리를 흔들며 시작한 ‘기차놀이’는 시민들의 행렬로 끝이 보이지 않았고 민주당을 연호하는 시민들의 함성은 지축을 흔들었다. 2002년 12월 20일 새벽.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광주의 풍경이다.

진보의 가치 지지했던 광주·전남

무엇이 광주·전남 시·도민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노 전 대통령은 정치적 역경을 겪을 때마다 스스로를 국민 앞에 내려놨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아내인 권양숙 여사의 아버지가 남로당 당원으로 밝혀졌지만 그는 오히려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고 대응했다. 위기를 원칙으로 이겨낸 ‘사이다’ 같은 결기였다. 낙선이 뻔한데도 지역주의 정치를 깨겠다며 잇따라 선거에 출마하면서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변화와 개혁이라는 진보의 가치를 추구했던 민주당의 승리에 대한 환호이기도 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이뤄냈던 직선제 개헌과 수평적 정권교체는 민주당의 피와 땀이 낳은 결실이었다. 그렇게 쌓여진 민주당의 역사 또한 지역민에게 자긍심이었다. 13대 평화민주당부터 14대 민주당, 15대 새정치국민회의, 16대 새천년민주당, 17대 열린우리당, 18대 통합민주당, 19대 민주통합당을 거쳐 21대 더불어민주당까지, 이름은 바뀌었지만 광주·전남 시·도민에게 민주당은 민주주의를 선도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할 유일한 정당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였다. 하늘을 찌를 듯 높았던 광주·전남 시·도민의 민주당에 대한 애정은 어느 순간 멈칫거리더니 얼마 전부터는 비참할 만큼 몰락세를 보이고 있다. 지지율이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여론조사까지 발표됐다. ‘김대중’도 없고 ‘노무현’도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의 민주당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민주당이 보여줬던 가치는 상식과 원칙이었다. 국민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해야 할 일을 결코 피하지 않았고, 그들이 보여준 원칙과 실천 또한 민주당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안겼다.

어느 순간 도덕성이 사라지고 특권과 기득권에 집착하는 지금의 민주당과는 분명 다른 결이다. 당장 민주당은 2021년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과 김남국 의원의 거액 코인 보유 거래 의혹 등으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지만 아직도 통렬한 자기반성이나 혁신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여론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꾸렸던 혁신위원회마저 하나마나 한 혁신으로 물거품이 됐다. 거대 야당의 힘을 바탕으로 그렇게 강조했던 민생이나 경제 또한 성과를 찾아보기 어렵다. 지지층만을 위한 팬덤 정치가 성행하고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도 민주당의 확장을 막고 있다. 시나브로 다가오는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도 국민의 관심을 받고 있다. ‘진보라고 도덕성을 내세울 필요가 있냐’는 현역 의원의 발언 또한 민주당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 망언이다. ‘세상에 이런 진보가 어디 있는냐’는 비아냥을 들어도 싸다.

도덕성과 함께 상식·원칙 지켜야

이제 22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8개월도 안 남았다. 2024년 구성될 22대 국회는 새로운 가치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하는 중요한 기회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라는 의미도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에 가장 필요한 것은 민주당의 기본 가치를 살리는 것이다. 노무현의 참모로 정치에 발을 들인 이후 , 20여 년 민주당에 열정을 바쳤다는 ‘원조 친노’ 조기숙은 지난 7월 발간한 저서 ‘어떻게 민주당은 무너지는가’에서 무너진 민주당을 다시 세우기 위한 혁신의 길을 제시했다. 가치와 염치, 민주적 의사결정과 관용이라는 두 개의 기둥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게 골자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보여준 통합과 민주주의 정신을 잊은 채,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적으로 간주하는 포퓰리즘이 이념이 돼 버린 편협한 정당, 상식과 염치, 젊은 세대마저 잃어버린 지금 민주당의 현실을 감안하면 공감되는 이야기다. 대중성을 잃고 도덕성을 외면한 채 정체성마저 바로 세우지 못하는 지금의 행태로는 민주당의 미래는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나오는 온갖 비리에 눈을 감고, 오히려 그 비리를 두둔하는 듯한 모습도 올바른 정치가 아니다. 도덕성을 최우선으로 내 세우고, 국민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상식과 원칙을 지키는 정치,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진보의 가치를 지켜가는 것이 민주당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지식인의 침묵과 외면이 만든 야만의 시대, ‘바보 노무현’이 정말 그리운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