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 윤선도-서인 송시열, 생사 넘나든 '악연과 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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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남인 윤선도-서인 송시열, 생사 넘나든 '악연과 필연'
남도 마실길 나들이 - 윤선도의 발자취 보길도
고산-우암, 대표적인 성리학자
박해ㆍ견제 속 치열한 정권 쟁탈
  • 입력 : 2017. 06.29(목) 00:00
성심온 전남대 명예교수가 완도 보길도 세연정에서 답사객들을 위한 즉석 공연을 해주고 있다.
전남도 '남도명품 100선 탐방'

지난 17일 전남 명품 100선 탐방 남도 마실길 나들이가 완도 보길도를 찾았다. '남도마실길' 세번째 주제인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 완도 보길도를 찾아서'라는 행사였다.

이른 아침부터 광주에서 서둘러 완도로 재촉했다. 보길도를 가기 위해선 예정된 뱃시간전에 도착해 차량 탑승 순서를 지키지 위해서다, 그런데 서둘러 출발했어도 예정된 뱃시간을 놓쳐버렸다. 탐방단 인원이 60 여명이나 되서 탑승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보길도를 가고 싶다는 서울과 대전에서 연락을 준 이들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타 시도 탐방객을 위한 우선 좌석배정을 고민해야 할 숙제가 생긴다. 이번 행사로 운송수단도 더불어 추가 되면서, 늘어난 경비 걱정이 앞선다. 이런저런 걱정 속에 프로그램을 진행해줄 이대석 선생이 화흥 포구에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줬다.

완도 보길도로 가는 길은 2곳에서 배편이 있다. 완도읍 정도리 화흥포와 해남 땅끝에서 가는 방법이다.

"보길도"하면 우선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가 떠오른다, 학창시절에 교과서에 삽입 되여 시험문제로 단골 문제로 몇 번은 고민 대목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번 보길도 여행에서 악연과 필연의 존재를 동시에 만났다.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와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살아생전에는 주거니 받거니 악연 속에 남인 정권을 잡으면 서인이 박해를, 또 어느 때는 왕이 견제 세력으로 이용하기도 하며,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 남인 핍박을 당하면서, 고산은 무려 3번 귀양으로 19년을 살아가며, 그의 나이 81세까지 귀양살이를 한다.

요즘은 관광상품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현장을 따라가 봤다. 그들은 남인과 서인에 거두이며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이다. 그 시대에 80이 넘도록 건강하게 천수를 하였으나 고산은 85세에, 우암은 제주 귀양살이 하다가 한양으로 국문을 받기위해 불려가는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는데 그때가 83세였다,

고산과 우암을 보길도가 태풍의 자연에 힘을 빌려, 그들을 인연의 자락으로 끌어 드렸다.

1636년(인조14년) 50세 되던 해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해남에서 변란 소식을 듣고 고산은 고향사람들과 집안의 젊은이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배 한척을 마련하여 급히 강화도로 향한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는 함락된 뒤였다. 고산에게는 아무런 힘없는 선비에 불과해, 피난하는 백성과 선비들이 말하기를 "임금의 수레가 적의 포위를 뚫고 동쪽으로 나와서 영남으로 향하고 있다." 하여, 고산은 남으로 돌아가면 조정과 연통하는 곳이 있을 것 같아 뱃머리를 남쪽으로 향한다.

배가 해남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고산은 연통을 받는다. 왕이 삼전도에서 청나라에게 치욕적인 화의를 맺고 한양으로 되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산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평생을 숨어 살기로 작정하고 제주도로 향하는데 항해 중 심한 풍랑으로 제주를 가지 못하고 보길도(甫吉島) 대풍(待風)구미에서 머무르게 됐다. 산수가 수려하고 천석이 절승함에 감탄하고 정착해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명명하고 격자봉 곁에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齊)라는 편액을 걸고 경서(經書)를 강의하며 후진을 가르치면서 자연에 몰입하는 운둔생활을 시작한 것이 인연의 시작 이였다.

우암 송시열 역시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으나 임금의 부름에 관직을 맞는다.

그러나 효종(1659)이 급서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제1차 예송(禮訟)의 소용돌이 당파싸움에 그에 시련의 시발점이 되었다가, 그도 결국은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의 호칭 문제로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될 때, 그는 세자 책봉에 반대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숙종의 미움을 받게 되고, 우암은 제주도 유배 길에 태풍만나 잠시 보길도 머문다,

이것이 자연이 엮은 인연 이였으나, 그는 이미 18년 전에 죽고 없는 고산의 흔적을 찾지 않는다.

윤선도는 조선중기에 호남이 낳은 문신ㆍ시조 작가이며, 경사서 제자백가(經史書 諸子百家)에 통달하여 천문, 지리, 의약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 했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했다.

그에 강직한 성격은 29살에 당시 최고의 실세인 이이첨ㆍ박승종ㆍ유희분 등을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려,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시작으로 그에 파란 만장한 삶의 시작 이였다.

50살에 보길도의 자연에 반하여 어부사시가 등의 주옥같은 글을 쓰며 세연정과 동천석실을 짓고 살다가 85세에 천수를 다하며 낙서재에서 눈을 감는다.

고산의 사후 2년 후부터 보길도에서 그에 흔적이 점점 사라진다, 당파의 후속타 일까? 아니면 자연 재해로 사라 진 것 일까, 필자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현존 건물은 복원된 것임)


박재완 <남도마실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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