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피묻은 책이 전두환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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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역사란 무엇인가' 피묻은 책이 전두환에 묻는다
현장에서
80년 5월 도청 지키다 숨진 청년이 품은 책 한권
궤변 일관한 '전두환 회고록'에 '진실을 말하라'
내달부터 5ㆍ18기록관에 나란히 전시 예정 '주목'
  • 입력 : 2017. 04.26(수) 00:00
광주 5ㆍ18민주화운동기록관 수장고에 보관 중인 E.H.카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 1980년 5월 27일 도청 앞에서 쓰러진 청년의 품에 있던 책을 당시 도청 직원이 간직해오다 지난해 5ㆍ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기증했다.
황지우의 시(詩) '묵념, 5분27초'는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다. 1980년 5월27일, 시민군이 옛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맞선 최후의 날이다. 긴 여백을 남긴 시 '묵념 5분27초'는 그날의 참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강렬한 메타포(metaphor)다.

그 울림은 옛 전남도청에서 300m 떨어진 곳에서 쟁쟁거린다. 그 곳엔 청년의 뜨거운 피가 묻은 책 한 권이 보관돼 있다. 금남로 5ㆍ18민주화운동기록관(이하 5ㆍ18기록관) 수장고에 있는 E.H. 카(1892~1982)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바로 그책이다. 책은 1980년 5월27일전남도청 지방과에 근무하던 직원에 의해 발견됐다. 출근길에 별관 옆 통로를 지나던 중이었다. 그는 흙바닥에 쓰러진 7~8명의 젊은이들을 보았다. 그중 한 청년이 피범벅인 가슴팍에 손바닥만 한 책을 안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까지 품에 안은 책은 무엇일까'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책을 숨겨 집으로 가져왔다.

36년이 흐른 2016년, 그는 이 책을 5ㆍ18기록관에 기증했다. 선명한 핏자국은 검게 변하더니 흔적을 감췄다. 뜨거운 혈흔은 세월에 지워졌고 책은 누렇게 변색됐다. 앞표지는 너덜너덜해졌다. 뒤표지엔 흐려진 이름 석자가 적혀있다. 5ㆍ18기록관은 1년째 책 주인을 찾고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E.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현재를 거울삼아 과거를 통찰하고,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라보며,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청년은 알고 있었을까. 그날 이후, 5월의 광주가 우리 사회에서 겪을 우여곡절을. 3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왜 광주였는지, 누가 총을 쏘라고 지시를 내렸는지…. '역사의 진실'이 지금도 가려져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안다면 얼마나 통탄할까.

옛 전남도청에서 300m 가량 떨어진 서점엔 역사를 왜곡하는 책 한 권이 진열돼 있다. 지난 3일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이다. 책방 구석 진열대에 아내 이순자 여사의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와 나란히 놓여있다. 현대사의 그림자와 맞물린 한 남자의 삶을 기록한 책은 '왜곡된 역사서'에 가깝다. 그럴싸한 논리로 과거의 잘못을 합리화한다. 그의 책은 희생자의 언어를 훔쳐 5ㆍ18을 폄훼하는 이데올로기에 힘을 보탠다.

전두환은 5ㆍ18민주화운동을 168쪽에 걸쳐 "1980년5월18일부터 5월27일 사이에 전남 광주에서 계엄군과 무장시위대 사이에 벌어졌던 유혈충돌 사건"으로 규정한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대한민국 군인들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5ㆍ18사태의 발단에서 종결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직접 관여할 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라며 자신의 책임을 은폐한다.

E.H. 카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기 위해 '역사란 무엇인가'를 썼다. 그는 "역사는 기존 질서에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했던 사람들에 의해 진보했다"고 했다. 1980년 5월 광주가 그랬다.

안타깝게도 '5월의 흔적'은 옅어지고 있다. 청년이 쓰러진 옛 도청 별관은 지금 거대한 현수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총탄이 빗발친 자국은 리모델링된 벽에 감춰졌다. 5월 단체들은 옛 전남도청 보존을 위해 231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다.

두 권의 책은 오는 5월12일부터 5ㆍ18기록관에 함께 비치될 예정이다. '발포'를 주제로 전일빌딩과 전남도청의 기록물이 전시된다. 잊혀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E.H. 카의 말처럼 정의와 민주가 반드시 실현되길 바란다.

글ㆍ사진=정다연 기자 dyjeong@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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