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효경 완도중 前교장. |
그런데 4월 4일 오전, 온 세상이 환호를 터뜨렸다. 여기저기 겨우내 웅크렸던 사지를 활짝 피고 두 손 높이 올리며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과 결정으로 모두가 힘들었었다. 어떤 사람은 주말마다 광장에 나갔고, 어떤 사람은 답답해 미쳐 버리겠다 했다. 많은 소상공인들이 참 견디기 힘들다 했다. 졸업을 앞둔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지쳐 쓰러질 지경이라 한다.
우리는 정말 두려웠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아연실색, 속수무책으로 두 발 동동거리며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는 벚꽃을 바라볼 여유도 없게 했다.
20여년 전, 장흥의 한 고등학교에서 2학년 부장을 맡았다. 40대 초반 미숙한 교사였던 나는 제주도로 300여명 학생을 이끄는 수학여행을 추진해야 했다. 사전 답사까지 다 마치고 마침내 떠나야 할 월요일 아침, 거칠고 큰 태풍으로 배가 출항하지 못했다. 당연히 수학여행은 뒤로 미루게 된 그날 아침, 교직원회의에서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해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하며 큰절을 했다. 마치 내가 그 태풍을 일으킨 것처럼, 자연의 순리 앞에서 속수무책인 것이 나의 책임인 것처럼 죄스러웠던 것이다. 한 학년을 이끌어가는 데도 세상과 자연이 도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여러 학생 교육활동의 진행을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알았고, 그 큰일이 적절하게 이뤄지지 않는 사태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나는 더 정성을 들이고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했다고 생각했다. 덕이 부족해 큰일을 그르친 것이고, 지성이 부족해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거칠고 부족한 나를 고개 숙이게 했었다. 지도자는 함부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소통과 겸손 그리고 정성과 사랑이 모든 일을 이겨내게 한다. 요동치는 우리 사회에 요즘 한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이다. 60년대 누구나 배고프던 시기에 제주 바다를 터전으로 억척스럽게 살아온 바닷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가족을 먹여 살릴 전복 하나 더 따려고 깊은 바다에 자맥질하고, ‘호오이~’ 숨비소리를 거칠게 뿜어내는 한 해녀와 그녀의 딸 애순, 그리고 그 애순이의 껌딱지 관식이가 주인공이다. 애순이는 엄마의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꿈이 야무지다. 제주의 어촌계장과 더 나아가 대통령을 꿈꾼다. 그 애순이를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코흘리개 관식이는 ‘영부인’이 꿈이다.
‘폭싹 속았수다’라는 제목을 쓱 훑어보고 드라마 내용을 대충 짐작했다. 인생이 다 그렇지. 속고 속이는 것이 인생이지. 속이는 줄 알지만 속아주며 살아가는 것이지 뭐. 남편이나 아내로 만나 처음에는 달도 별도 다 따준다고 사랑을 고백하지만, 어디 맘처럼 쉬운가? 뜻하지도 않게 고난이 닥쳐오고 서로 고생을 시키게 되며, 거짓말도 하고 상처를 주고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드라마 속 인물들은 거칠게 수고하며 살아온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우리네 어머니 대부분이 애순이지 않을까? 어떤 아버지는 관식이고, ‘학 씨’이다. 우리의 아이가 ‘금명’이고 또 ‘은명’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들이 쓰고 듣는 언어가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선장 ‘학 씨’는 돈은 많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없었다. 사람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그 말투대로 그는 늘 외롭다. 어촌계장 선거에서도 애순에게 졌고, 자기가 번 돈으로 세끼 밥 먹고 호강했다고 큰소리치던 식구들에게서 종국엔 외면을 당한다.
애순과 관식은 가난했지만 그들의 언어는 늘 따뜻하다. 애순과 관식은 공부도 잘하고 시도 잘 쓰는 딸 금명이가 고맙고 신기하다. ‘넌 하고 싶은 것 다 해. 뭐든 다 해. 엄마가 있잖아.’ ‘금명아, 하고 싶은 것 있으면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 그런데 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빽’해. 아버지가 지키고 있으니까. 다시 시작하면 돼. 너는 뭐든지 다 잘하잖아.’ 그래서 딸 금명이는 듣고 보고 배운 대로 힘차고 당당하게 살아 내고 끝내 성공을 거둔다.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바로 얻은 것 같지만, 곧 잃는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는가. 어떤 언어로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가가 그 사람의 근본이고 그 위에 그 사람의 삶이 세워진다. 우리 모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이 이 세상의 어떤 사람들을 세우고 일으키는 것이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슬프지만 장한 인생으로 남는다. ‘참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진심의 말을 들으며.
이 봄에 이 땅에 뿌리 내리고 같이 아쉽고 슬펐던 아까운 당신들이여, 모두 폭싹 속았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