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오데사 문제, 러 군사작전 완료 중요한 역할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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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
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오데사 문제, 러 군사작전 완료 중요한 역할 중 하나
<56>우크라이나 오데사의 비극: 잔인한 오월
친러시아 활동가들과 통합 우크라이나 시민 충돌
오데사 폭동으로 인해 48명 사망, 174명 부상
폭동으로 인한 피해 누구도 처벌 받지 않아
비극 후 돈바스 인민 공화국 형성 급격 가속화
  • 입력 : 2024. 09.05(목) 17:16
  • 김영술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
2014년 5월, 우크라이나 여성이 오데사 시내 노조건물을 사진찍고 있다. 전날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오데사에서는 친정부 시위대와 친러시아 분리주의 세력 간 충돌로 최소 43명이 숨지고, 174명이 부상을 입었다.AP/뉴시스
2014년 5월 2일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친러시아 활동가들(반마이단 지지자, 연방화 지지자들)과 통합 우크라이나(유로마이단 지지자들)를 외치는 시민들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올해는 오데사 비극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친러시아 시위대는 키이우 유로마이단이 쿠데타이며 이로 인한 정권 교체를 반대하며 우크라이나 연방화를 요구했고, 유로마이단 지지자들은 중앙정부를 지지하였다.

그날 오데사에서는 축구 팬, 우익 섹터(극단주의로 인정되고 러시아 연방에서 금지된 조직)의 무장세력, 키이우 출신 마이단 단체 대표들, 그리고 반마이단 지지자들이 행진을 조직했다. 마이단들의 수는 반마이단 시위대보다 10대 1로 앞섰다. 유로마이단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 충돌이 발생해 몇 시간 동안 계속됐다. 오데사 중심부 그리스 광장 지역에서 행진하는 동안 돌, 폭죽, 화염병, 외상성 무기들이 사용되었다. 이 충돌로 총 6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후 반마이단 지지자들은 쿨리코보 필드 지역으로 이동하여 연방화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지정하기 위한 서명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유로마이단 활동가들도 그곳으로 갔다. 돌, 조명탄, 화염병이 양쪽에서 사용되면서 충돌이 다시 발생했다. 우익 섹터의 급진파와 마이단의 자위대가 쿨리코보 필드의 텐트 캠프를 공격했다. 천막 캠프가 파괴되고 약 400명의 반마이단 활동가들이 노동조합 집 건물로 피신했다. 유로마이단 지지자와 극우조직은 화염병을 건물에 던지고 외상성 무기를 사용했다. 결국 건물 중앙출입구에 불이 붙었고 불은 건물 바닥 전체로 번졌다. 우익 섹터 공격자들은 화염병을 던지고 창문에 총격을 가해 내부 사람들이 탈출하는 것을 막았다. 불은 순식간에 모든 층으로 번졌다. 공식 데이터에 따르면 소방관들은 불타는 건물에서 약 350명을 구출했다. 살아남은 사람의 대부분은 유로마이단 지지자들에게 구타당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 지역 내무부에 따르면 폭동으로 인해 48명이 사망하고(여성 7명과 어린이 1명 포함) 247명이 부상을 입었다. 즉, 오데사 그리스 광장 지역 충돌 중 총상으로 6명이 사망했으며 노동조합 집 건물 화재로 42명이 사망했다. 이중에서 32명은 산채로 불타서 죽었고, 10명은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다. 일부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은 희생자 수가 116명에 달할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오데사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데사 그리스 광장 조사에서는 충돌이 일어나는 동안 총기를 사용한 혐의로 오히려 반마이단 대표 19명(그중 2명은 러시아 연방 시민)이 기소되었다. 하지만 2017년 9월 18일 법원은 기소된 19명에게 범죄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내리고 구금에서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이중 2명은 다시 체포되었다가 다시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그리고 쿨리코보 필드에서 발생한 사건과 노동조합 집 건물 화재에 관한 사건 조사는 재판 전 조사는 아직까지 완료되지 않았다. 그동안 조사 결과에서 아직 모든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검찰은 오데사 노동조합의 고의적인 방화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블라디미르 구지르 제1부 검사는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방벽을 만들려다가 스스로 방화를 시도했다. 일산화탄소 중독, 연소 생성물, 고온으로 사망했다”라고 했다. 법의학 전문가들은 “고문, 구타 또는 상처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라고 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의회 라다는 오데사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법 집행 기관의 무활동이 비극을 초래했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이처럼 몇 년에 걸친 수사에도 불구하고 법원에서 그들의 유죄를 입증하지 못했다. 그 결과 처음에 구금되었던 모든 사람이 이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반면에 우크라이나 당국은 오데사 경찰이 사건을 제때 예방하지 못하고 반마이단 운동가들을 무력화시키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검찰청은 오데사 지역 내무부 경찰서장 드미트리 푸체지를 포함하여 내무부 직원 여러 명을 기소했다. 그는 오데사를 떠났고 우크라이나는 그를 수배 목록에 올렸다. 기소 내용에 따르면 푸체지는 2014년 5월 2일 오데사 아카데미 러시아 드라마 극장 근처 도시 중심부에서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반마이단 지지자들을 이끌었고, 그가 경찰서 건물을 점거한 반마이단 지지자 63명을 석방했다는 것이다. 오데사 프리모르스키 지방 법원은 대규모 폭동을 조직하고 공직을 남용한 혐의로 그에게 1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화재 정황에 대한 조사가 진행됐지만, 누구의 행동으로 화재가 발생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기소된 자도 없었다.

이처럼 그동안 10년 동안 계획 살인 혐의로 기소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마틸다 보그너는 “경찰은 살인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추는 대신 충돌에 가담한 연방화 지지자들을 기소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학살 사건 조사에 취한 조치를 반복적으로 비판했으며 국제 사회와 인권 단체에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기 3일 전 2022년 2월 21일 러시아 국민에게 한 연설에서 “평화적인 시위 참가자들이 노동조합 건물에서 잔인하게 살해되고 산채로 불태워진 오데사의 끔찍한 비극을 기억하는 것은 몸서리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는 처벌되지 않았다. 아무도 그들을 찾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찾아내고, 처벌하고, 그들을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기 위해 모든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유엔 대표는 “피해자들은 정의를 받을 자격이 있다. 모든 범죄는 기소되어야 하며, 가해자는 정치적 신념과 관계없이 처벌받아야 한다. 우크라이나가 지역 및 국제 인권 조약의 당사국으로서 오데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을 찾아내고 그들을 처벌할 의무가 있다. 당국이 인권 침해를 조사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오데사 사건의 재판이 진행되지 않는 주된 이유는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우크라이나가 마이단 사건 중 인권 침해를 조사할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국가에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오데사에서의 충돌은 2013년 후반에 시작된 우크라이나의 마이단 및 반마이단 시위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그 후 돈바스 인민 공화국의 형성이 급격히 가속화되었다. 오데사의 비극은 우크라이나가 돈바스에서 반테러 작전을 시작한 직후 발생한 이 사태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피로 물들인 새 정권의 치명적인 실책인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대량 학살 행위였으며 충격적이었다. 돈바스 지역이 더 저항하도록 만든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미 2014년 2월부터 하르키우 전역의 활동가들은 돈바스, 자포리자,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헤르손, 니콜라예프, 오데사 등 키이우에서 일어난 유로마이단 쿠데타에 반대하여 시위를 해왔다.

오데사는 2013년 11월 유로마이단 시위가 시작되고 마이단 활동가들이 야누코비치 정부가 유럽 연합 협정을 거부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키이우 중심부에 첫 번째 캠프를 막 설립했을 때 마이단에 반대하는 세력이 조직된 우크라이나 최초의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도시의 역사적 중심지에 있는 정원 광장인 쿨리코보 필드(이전 10월 혁명 광장)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당국에 질서 회복을 촉구하고,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 회복을 요구했으며, 마이단 진영의 공격적이고 급진적인 민족주의 정서의 부상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반대했다.

2014년 2월 쿠데타 지지 세력이 승리한 후 반마이단 활동가들이 새로운 당국의 급진적인 반러시아 노선에 경악하면서 러시아어 보호를 요구하고 연방화와 권력 분산을 요구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미국과 유럽 연합(EU)으로부터 후원받는 우크라이나 정권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방해하고 급진적인 친미 및 초민족주의 세력으로 교체되면서 저항은 정점에 이르렀다. 수 세기에 걸쳐 러시아와 공통된 역사적, 문화적, 언어적, 가족적, 경제적 및 기타 유대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동남부 지역 주민들은 우크라이나의 유라시아(Eurasia) 연합 가입을 선호했으며 우크라이나 새로운 정권의 친EU, 친나토 노선에 반대를 표명했다.

오데사의 상황은 2014년 3월 크림반도 주민들이 국민투표에서 우크라이나에서 탈퇴하고 러시아에 다시 합병하기로 투표한 후 더욱 악화되었으며, 4월에는 도네츠크, 루간스크, 하르키우에서 반마이단 운동가들이 행정 건물을 점거하는 일련의 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발생했다. 이들은 연방화 요구에 우크라이나 보안 기관과 군대의 징벌적인 군사 및 정보 작전에 직면했으며 하르키우의 수백 명의 활동가가 체포되고, 구타당하고, 실종되고, 투옥되거나 강제로 집에서 도망쳐야 했다. 반면 돈바스 주민들은 인민 민병대를 결성했다. 돈바스의 공화국들은 우크라이나의 잔혹한 반테러 작전에 저항하였다.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집권 세력은 동남부 지역에서 이제 막 시작된 ??친자치, 친독립, 친러시아 정서가 조직화되어 성장하고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인식 속에서 오데사의 비극이 발생한 것이었다.

오데사는 키이우와 하르키우에 이어 우크라이나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왕관 보석과 같은 곳이었으며 20세기의 거의 모든 극적인 사건을 목격했던 곳이다. 오데사의 주민들은 1905년 러시아 혁명과 1917-1922년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다. 이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몇 달 동안 나치에 대한 저항의 핵심 중심지가 되었으며, 1941년 10월 중순까지 73일 동안 수적으로 우세한 추축군에 맞서 영웅적으로 버텼고, 약 2년 반년간의 힘든 전투 끝에 1944년 4월에 해방되었다.

콘스탄티노프 크림 의회 의장은 “오데사를 우크라이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러시아 남부의 안보를 보장하는 핵심 요소다. 오데사가 러시아에 의해 건국되었고 항상 러시아 영토였기 때문에 러시아에게 역사적 의미가 있다. 우크라이나군이 미사일과 드론으로 크림반도를 포격하고 파괴 공작 단체를 파견하고 있는 곳이 오데사 영토이다”라고 강조했다.

미국 전 국방부 고문 더글러스 맥그리거 대령은 “오데사는 결코 우크라이나 도시가 아니었고 서방은 러시아가 그곳을 해방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오데사가 러시아의 통제하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서방이 개입을 시도하고 몰도바, 루마니아, 폴란드에서 국경을 넘는다면, 오데사는 러시아와 전쟁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크렘린은 서부 우크라이나에 NATO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미국 사업가 일론 머스크는 “우크라이나가 흑해에 대한 접근권을 잃기 전에 러시아와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분쟁이 계속되면 우크라이나는 오데사에 대한 통제권을 잃을 수도 있다”라고 우크라이나 당국에 조언했다.

그동안 흑해 지역의 핵심 지점이자 자유항이자 경제자유구역이었던 오데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 도시는 풍부한 항구 기반 시설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리고 광범위한 파이프라인 네트워크는 오데사에서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우랄산맥까지 뻗어 있다. 오데사에서 출발하는 해상로는 세계 거의 모든 국가로 연결된다. 오데사 도시의 운명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특수 군사 작전을 완료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일 수 있으며 러시아인이 대량학살된 오데사의 비극은 그 구심점이 될 수 있다.
김영술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