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올해는 '전라도(全羅道)'라는 이름이 붙여진 지 1000년이 되는 해다.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앞자를 따 명명한 것이다. 이는 1314년 경주와 상주의 앞자를 따서 경상도라고 이름붙인 것에 비해 300여 년이 앞선 것이다. 이는 당시 전라도의 중요성이 그만큼 높았음을 반증한다.
서울시립대 이익주 교수는 "전라도 지역은 문화가 발달하고 경제가 번영한 곳이었다"고 진단했다. 그는 신라말에는 장보고의 완도 청해진을 통해 동북아시아 경제의 중심이었을 정도로 번성했고, 고려시대때는 전라도 남부해안은 동북아시아의 경제의 거점이 됐다고 했다. 또 조선에서는 경제적인 여유와 지리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전라도의 뛰어난 승경이 합쳐지면서 이지역사람들의 예술혼을 자연스럽게 일깨웠다고 했다. 이 교수는 또 "조선 이후 전라도는 곡창으로 인식됐고, 전라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전국민을 먹여살렸다. 그 전라도의 풍요로움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된다"고 했다.
그만큼 전라도는 신라말 이후 우리나라를 지탱하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이었다.
그런 전라도가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경제개발에 돌입하면서 대이동이라는 격변기를 맞는다. 고향을 뒤로 한 채 먹거리를 찾아 도시로, 공장지대로 대거 이동하는 심각한 탈고향, 즉 이농(離農)현상을 겪었다.
향우들에 따르면 1960년대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약 1200만명의 전라도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과 부산, 울산, 구미, 제주도 등 전국 각지로 먹거리를 찾아 떠났다고 추산하고 있다.
서울 320만명, 경기도 390만명, 인천 100만명 등 수도권만 810만명, 그리고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으로 400만명의 전라도 사람들이 고향을 떠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가운데 광주와 전남 사람들이 800만명, 전북 사람들이 400만명 정도를 차지한다고 보고 있다.
김대화 재경광주전남향우회장은 "이같은 수치는 향우조직을 하면서 모이는 향우숫자를 어림잡아 계산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일치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김 회장은 "당시 농사가 주업이었던 전라도 부모들은 농업으로는 더 이상 먹고살기가 힘들기 때문에 초ㆍ중학교만 졸업하면 '너라도 굶지 말고 살아라'며 자녀들을 대도시로, 공장지대로 떠나도록 권했다"면서 "한 동네에서 한 사람이 타향에서 새 직장을 잡아 자리잡으면 가족ㆍ친척이나 가까운 동네사람들을 불러들였다"고 했다.
이처럼 풍요의 고장에 살던 전라도 사람들은 정도(定道) 천년(千年) 이후 초유의 사태을 맞이 했던 것이다.
전라도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기 시작한 시점은 지난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도입되면서부터다. 산업화 초기,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주도 공업화를 위해서는 공장노동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또 저임금의 산업노동자들을 공장에 공급하기 위해 도입된 정책이 농산물에 대한 저곡가정책이었다. 이는 곧 농업의 붕괴를 의미했다. 농촌에 살던 농업인들은 더 이상 농촌에서 살 수 없게 되자 도시로 떠나 공장근로자가 됐다. 이 여파로 나타난 것이 전라도의 심각한 '이농현상'이었다.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제1차(1962~1966), 제2차(1967~1971) 경제개발5개년계획, 중화학공업 육성을 강조한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이어지면서 우리나라는 연평균 10%에 가까운 성장률을 보였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장했지만 전라도는 피폐해져 갔다.
당시 호남선과 전라선이 멈추는 역 대합실은 '이별의 정거장'이었다. 순박한 농사꾼의 아들ㆍ딸들은 고향을 뒤로 한 채 눈물을 감추며 미지의 세계로 떠나야 했다. '무작정 상경'도 이때 나타난 현상이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향한 곳은 서울이었다.
서울로 향했던 '돈없고 백없는' 전라도출신들은 하늘을 이불삼아 잠을 청하면서까지 '자수성가'라는 이름을 달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급격히 팽창한 서울에서 부자의 꿈을 실현할 일자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늘어나는 인구만큼이나 생활비도 많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경제개발의 여파가 점차 서울과 인접한 경기도로 확장되면서 일자리에 대한 경쟁도 그만큼 적은 곳이 경기도였다. 집을 지을 땅값도 훨씬 쌌다.
특히 경기도내 신설 산업단지는 호남사람들의 주요 이주 지역이었다. 반월공단이 들어선 안산시가 대표적인 지역이다. 어쩔 수 없이 경기도로 이주해야만했던 가슴 아픈 사연도 있었다. 서울 중심가의 도시정비 일환으로 정부가 1967년 서울 청계천과 용산 뚝방촌에 산재해 있던 판자촌을 정비하면서 이곳 거주자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전라도 사람들은 현재의 성남시(당시 경기도 광주군)로 강제 이주해야 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경제개발이 경부축을 중심으로 주로 경상도 지역에서 이뤄지면서 개발바람이 불어닥친 부산 등 영남지역도 전라도사람들이 일자리를 찾는 곳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부산은 신발산업의 호황기를 맞았다. 이에 필요한 노동력의 공급처는 전라도였다. 목포ㆍ고흥ㆍ장흥ㆍ여수 등 전남 남해안 지역 사람들은 불편한 육상교통 대신 배편을 이용, 부산에 도착해 영도 등 부두 인근에 정착했다. 또 버스를 이용해 부산에 입성한 향우들은 부산 사상구 등 공단지역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대표적인 신흥 산업도시로 개발된 울산과 구미도 전라도 사람들이 산업노동자로 찾아든 대표적인 곳들이다.
울산은 1960년대 중반 이후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울산정유공장 등 중화학공업을 위한 전진기지로 개발된다. 개발은 곧 노동력 수요로 이어졌다. 전라도 젊은이들은 1970년대 들어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등 대규모 인력을 필요로 하는 공장들이 본격 가동되면서 울산으로 대거 이동했고 이 이동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약 120만 울산 인구 가운데 약 23만명으로 추산되는 호남향우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구미공단은 전라도 여성들의 주 이동지역이었다. 산업의 성격상 울산 중화학공업단지는 주로 남성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구미 국가산업단지는 섬세한 여성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전라도의 젊은 여성들이 주로 이동한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구미호남향우회는 여성향우들이 요직을 맡고 있는 등 여성파워가 센 지역으로 분류된다.
제주도도 전라도 사람들의 새로운 보금자리였다. 60만 제주도민 가운데 호남향우가 12만명으로 추정되는 점에서 제주도로 이주한 전라도 사람들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제주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전남 남부지역 사람들이 주로 이주한 곳이다. 진도 벽파진과 목포항은 제주도로 가는 길목이었다. 격랑을 헤치며 달려간 제주도에는 해남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래서 제주항 부두노동자들이 모여살던 곳과 밀감농사가 주류를 이루는 서귀포에는 '해남촌'이란 이름이 붙을 정도였다. 이밖에 대전, 대구, 강원도ㆍ경기도의 최전방 등 전라도사람들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달려갔다.
우리나라가 경제개발을 통해 경제강국으로 부상하는데 전라도사람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수출부국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 조성된 산업단지를 지탱해준 노동력은 전라도사람들의 손과 발이었다. 전라도사람들의 부르튼 손과 발로 경제강국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저곡가 정책에도 불구하고 전라도는 높은 농업생산력으로 전 국민을 먹여살렸다.
이익주 교수는 "1960~1970년대 산업화를 이루고 경제를 발전시키지만 그 밑바탕에는 국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했다"면서 "1977년 전국 쌀생산량을 전국적으로 비교해보면 전라남북도의 생산량이 전국 31%에 달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을 배고픔에서 해방시킨 것은 그 어느누구도 아닌 전라도의 농민들이었다"고 했다.
경제개발과정에서 가장 필요했던 값싼 노동력의 공급처였고 이를 지탱해줄 식량문제를 해결해준 곳은 바로 전라도였다.
뿐만이 아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뛰어난 '맛과 멋'을 전국에 전파했다. 산업현장에 자리를 잡은 전라도 사람들은 우수한 전라도의 문화ㆍ예술을 타향에 심고, 그만큼 우리나라의 삶의 질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은 "한마디로 말해 안에서 잃은 것을 밖에서 찾으려는 전라인들의 내재된 안간힘이 전국 주요 산업개발지역으로의 대이동, 이른바 전라도민의 '현대판 디아스포라'이었다"고 말했다. 김 전 장관은 "특히 후백제 멸망 이후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전방위적으로 핍박과 수탈만 받아온 전라인들이 유일한 탈출구로 전국 주요 공업ㆍ수출단지의 산업역군으로 뛰어들게 한 것"이라면서 "이는 1200여 년 전 정치에서 잃은 것을 경제, 그것도 해외경영에서 찾아 찬란한 신라문화를 꽃피우게 했던 해상왕 장보고 장군의 개척정신이 전라인들의 피와 몸 속에 면면히 이러져 온 결과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강덕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