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루이16세와 그의 아내 마리 앙투와네트가 장식용으로 사용한 보라색 감자꽃. |
비타민C 열에 강해 어떤식으로 조리해도 쉽게 파괴안돼
칼륨성분 때문에 알칼리성 식품 작용해 우리 몸 균형 맞춰
1824년~ 1825년 사이 "청나라 사람이 산 속 감자 경작"
1832년 "전라북도 해안 영국 선교사 씨감자 재배법 알려"
아일랜드 유럽서 가장 먼저 식용 재배… 척박한 땅서 잘 자라
24절기 중 열 번째 절기는 하지(夏至)이다. 하지는 양력으로 6월 21~22일 경으로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높이 뜨고 낮의 길이도 제일 길다. 된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경계이기도한데 보리와 감자, 마늘을 수확하고 모내기와 늦콩심기 등 각종 농사의 마무리와 준비가 이루지는 시기이다.
하지에는 '감자천신한다'는 말이 있다. '천신(薦新)'은 햇과일이나 햇곡식을 가장 먼저 조상께 올리는 의식을 의미한다. 가장 처음 수확한 감자로 만든 음식을 조상께 올리고 음복하며 건강한 여름나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특히 장마가 들기 전에 수확한 햇감자를 하지감자라고 한다. 하지감자는 껍질이 얇고 맛도 좋으며, 차가운 성질은 여름을 견디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감자의 비타민C는 열에 강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조리를 해도 쉽게 파괴되지 않아 여름철 식재료로 백점만점이다.
우리나라에 감자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조선시대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은 기아에 허덕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가뭄과 장마로 인한 흉년까지 겹치면서 구황작물에 대한 욕구가 계속되었다. 벼와 보리 등 곡물로는 부족한 식량을 채워줄 작물이 절실히 필요하게 된 것이다. 백성들에게는 목숨이 달린 일이고 국가 존립의 문제인 먹을거리를 해결해 준 대표 구황작물로 감자와 고구마가 있다.
우리나라에 감자가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북방유입설과 남방전래설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1824년과 1825년 사이에 "삼(蔘)을 캐려고 국경을 넘어온 청나라 사람이 산 속에 살면서 감자를 경작하였다. 이들이 떠난 뒤 남겨진 감자를 옮겨 심었는데 크게 번식하였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고, 생김새는 무나 토란과 같았다"고 한다. 엄청난 번식력과 식량으로써의 쓰임새로 인해 감자는 보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으로 퍼지게 된다. 심지어 산골짜기 촌에서는 감자만 심어 1년치 양식을 마련할 정도였다.
또 김창한은 '원저보(圓藷譜)'에서 1832년 전라북도 해안에 머물던 영국의 상선에서 씨감자를 나누어주고 재배법을 가르쳐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창한은 그의 아버지가 영국 선교사로부터 재배법을 배우고 이를 보급시킨 내력을 자세히 적었다.
일제강점기에 쌀은 주로 일본으로 수출되었기 때문에 일부 상류층의 주식일 뿐이었고, 고구마와 더불어 감자가 서민 식생활의 중심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등장하는 감자를 통해 알 수 있다.
잔소리를 두루 늘어놓다가 남이 들을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그 속에서 깔깔댄다. 별로 우스울 것도 없는데 날씨가 풀리더니 이놈의 계집애가 미쳤나 하고 의심하였다. 게다가 조금 뒤에는 제 집께를 할금할금 돌아보더니 행주치마의 속으로 꼈던 바른손을 뽑아서 나의 턱밑으로 불쑥 내미는 것이다. 언제 구웠는지 아직도 더운 김이 홱 끼치는 굵은 감자 세 개가 손에 뿌듯이 쥐였다.
"느 집엔 이거 없지?"하고 생색 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은 큰일 날 테니 여기서 얼른 먹어 버리란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너 봄감자가 맛있단다." - 김유정 '동백꽃' 中
주인공에게 감자를 건네는 점순이는 마름의 딸이다. 이 장면에서 점순이네는 귀한 봄감자를 세 알이나 챙겨줄 만큼 넉넉한 살림임이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주인공인 나는 소작인의 아들로 '느 집엔 없는' 감자를 챙기는 점순이를 마냥 편하게 대할 수 없어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만다.
서양에서 감자는 악마가 먹는 음식이라는 누명과 신이 내린 가장 위대한 축복이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유럽에 도입된 후 아일랜드와 프랑스를 뺀 다른 지역에서 감자는 인기가 없었다. 열매나 줄기가 아닌 뿌리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고, 단맛도 쓴맛도 없이 밍밍한 맛도 부정적인 소문에 힘을 보탰다. 심지어 감자가 한센병을 일으킨다는 근거없는 소문까지 있었다. 처음 도입되었을 때 감자는 식량이 아닌 관상용 화초로 인기가 있었는데, 프랑스의 루이16세와 그의 아내 마리 앙투와네트는 보라색 감자꽃을 장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감자를 식용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주는 감자는 신의 축복이었고, 간단한 조리만으로 한끼 식사를 해결해주는 고마운 작물이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마션(The Martian)'에서는 물도 공기도 없는 척박한 우주에서 자라는 감자의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식량으로 가져간 감자가 싹을 틔우는 것도 신기하지만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구조를 기다리는 오랜 시간 동안 주인공이 감자만으로 버텨야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감자의 주성분은 탄수화물이지만 생긴 모습과는 달리 사과보다 3배나 많은 비타민C를 함유하고 있다. 또 섬유질이 풍부하고 철분, 마그네슘과 같은 중요한 무기성분 및 인체에 꼭 필요한 다양한 비타민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감자는 칼륨성분 때문에 알칼리성 식품으로 작용하여 우리 몸의 균형을 맞춰준다. 이쯤 되면 우주의 시간을 견디게 해줄 원푸드로 손색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현재 감자는 전국각지에서 재배된다. 그만큼 식재료로써 사용처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감자전, 감자볶음, 감자국, 알감자조림, 감자떡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전라도에서 여름감자는 각종 조림에서 빛을 발한다. 얼큰한 병어조림과 갈치조림, 가자미조림에 들어간 감자는 조림양념을 듬뿍 머금은 채 포실포실 부서지는 식감이 그만이다. 발그레한 조림양념 옷을 입은 감자에 더운 김 훅훅 불어가며 먹는 모습에서 제철 음식이 바로 보양식이 됨을 느낄 수 있다.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 학예사
백미영의 음식이야기
고구마는 감자와 함께 조선후기에 도입되어 구황식품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고구마가 도입된 것은 1763년 조엄에 의해서이다. 조엄은 통신사로 대마도에 들러 고구마의 보관법과 재배법을 익혀 그 종자를 우리나라에 전했다.
조엄의 '해사일기(海?日記)'에는 다음과 같이 고구마가 묘사되어 있다.
색은 붉은색을 띠며 그 맛은 구운 밤 맛과도 같다.
고구마는 생으로 먹을 수 있고, 구워서도 먹으며, 삶아서도 먹을 수 있다. 곡식과 섞어 죽을 쑤어도 되고, 떡을 만들거나 밥에 섞어도 된다. 고구마를 넣어 되지 않은 음식이 없으니 이 고구마가 조선 팔도에 퍼진다면 굶주리는 백성이 결코 없을 것이다.
1778년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는 '나라에서 둔전관을 시켜 고구마를 따로 심게 하고, 서울의 살곶이와 밤섬 등에도 많이 심게 한 적이 있어서, 백성들에게 스스로 심게 한다면 잘 번식할 것이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구마가 서울에서 경작된 정황을 알 수가 있다.
고구마의 효용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관련 서적들도 편찬되었다.
1766년 강진사람 강필리는 '감저보(甘藷譜)'를 저술하면서 면적당 수확량이 많고, 맛이 좋으며, 흉년에 곡식을 대신할 수 있고, 술을 담글 수 있는 점 등 고구마의 장점을 열거하였다.
1813년에는 김장순과 선종한이 '감저신보(甘藷新譜)'를 지었다.
김장순은 전라도 보성에서 9년 동안 고구마를 연구한 선종한을 만나 서울에서 시험 재배를 하는 일 등 주로 우리나라에서의 재배경험을 토대로 저술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서유구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가뭄으로 유랑하는 농민들을 구휼하고자 씨고구마를 구하여 그 재배와 이용법을 가르치기 위해 편한한 책이 '종저보(種藷譜)'이다.
이책은 앞서 언급한 국내의 책들과 중국, 일본의 관련 서적을 참고하여 집대성하였기 때문에 고구마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