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딱 봐도 명당… 절의·기개 인물들 많아 '자긍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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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딱 봐도 명당… 절의·기개 인물들 많아 '자긍심'
화순 쌍봉마을||마을 둘러싼 산 쌍쌍 이뤄 '쌍봉'||호남화단 선구자 양팽손 학포당||능주 유배 조광조와 뜨거운 우정||의병 호남창의소 양회일 순의비||전통이 살아있는 '남도의 보물'
  • 입력 : 2022. 10.20(목) 16:02
  • 편집에디터

도로변에서 본 쌍봉마을 풍경. 벼가 누렇게 익으면서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이돈삼

산이 높고 골이 깊다. 육봉, 대산 등 여러 산봉우리가 첩첩으로 둘러싸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맑은 물이 흐른다. 풍광이 아름답다. 한눈에 봐도 명당이다. 사람이 살기에도 좋아 보인다. 역사와 전통도 묻어난다. 경험칙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두 봉우리가 있다고, 마을을 둘러싼 산들이 쌍쌍을 이룬다고 '쌍봉(雙峰)'으로 이름 붙었다. 인근에 있는 절집 쌍봉사의 이름을 따왔다는 얘기도 있다. 쌍봉사는 철감선사 도윤(798∼868)이 창건했다.

마을의 역사가 쌍봉사와 엮인다.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도 쌍봉사가 세워지면서다.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사는 마을로 바뀌었다. 김해김씨, 제주양씨, 하동정씨가 연달아 들어오면서 마을이 달라졌다.

마을 입구에 김해김씨 충신각이 서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김해김씨 3명의 정려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김인갑(1564∼1593)․김의갑(1566∼1593) 형제와 병자호란 때 죽은 김시엽(1589∼1637)의 충의를 기리고 있다. 인갑․의갑 형제는 임진왜란 때 유생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모친상 땐 3년 동안 시묘를 했다. 충신각은 1872년에 세워졌다.

김해김씨 충신각. 김해김씨 3명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다. 이돈삼

학포 양팽손(1488∼1546)의 서재인 학포당도 마을에 있다. 노랗게 변색되기 시작한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어우러진다. 나무의 키가 35m, 둘레 8m에 수령 500년 남짓 된다. 양팽손의 둘째 아들 응태가 심었다고 전한다.

학포당은 1521년 양팽손이 지었다. 처음엔 '쌍봉정사'로 이름 붙였다. 양팽손은 형편이 어려운 후학들에게 방을 내줬다. 끼니를 잇지 못하는 학동의 집에 양식도 보냈다. 후학들도 기쁜 마음으로 그를 따랐다.

양팽손은 후학을 가르치며, 틈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양팽손은 서화(書畫)에 능했다. 산골 선비의 고고한 삶을 시문으로 남겼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의 작품은 10여 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산수도는 16세기 한국 회화를 대표한다. 호남 화단의 선구자였다. 그의 화풍은 공재 윤두서, 소치 허련으로 이어졌다.

지금의 학포당은 1922년에 다시 지었다. 앞면과 옆면 각 3칸 규모다. 지붕은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하고 있다.

양팽손은 어려서부터 강직했다. 천부적인 글 재주도 지녔다. '天地爲吾量 日月爲吾明 天地與日月 都是丈夫事-천지는 나의 도량이 되고, 일월은 나의 밝음이 되니, 천지와 일월은 도시 장부의 일이라.' 양팽손이 7살 때 '천지일월(天地日月)'을 주제로 쓴 글이다.

양팽손은 지지당 송흠(1459~1547)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공조좌랑, 형조좌랑, 사관원정원, 이조정랑, 홍문관교리 등을 지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정암 조광조(1482~1519)가 능주로 유배돼 왔다. 양팽손은 날마다 조광조를 찾아갔다.

덕과 예를 갖춘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며 그리워했다. "더불어 이야기하면 마치 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서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갠 뒤의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人慾)을 초월한 사람이다." 조광조가 평한 학포의 인품이다.

1519년 12월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다. 두 사람이 나눈 우정과 절의는 그때 더욱 빛을 발했다. 양팽손이 조광조의 시신을 손수 수습해 장례를 지냈다. 죽음을 무릅쓴 의리였다. 쌍봉사 근처 깊은 산골에 가묘를 만들고 추모했다.

감투봉 자락에 한후정도 있다. 양재경(1859∼1918)이 1904년에 지었다. 양재경은 죽수서원에 '정암 조선생 서원 유지 추모비'를, 학포당엔 '양선생 학포당 유지 추모비'를 세웠다. 마을 주변의 경관을 읊은 시 '쌍봉십이곡'도 지었다. 마을에서 쌍봉사까지 10리 협곡을 가리킨다. 최근 쌍봉저수지를 새로 만들면서 협곡이 모두 사라졌다.

쌍봉마을 표지석. 마을의 지명 유래를 써 놓았다. 이돈삼

양팽손의 절개는 양회일(?∼1908)의 한말 의병운동으로 이어졌다. 양회일은 1907년 집안의 재산을 털어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증동에 살던 임노복의 도움을 받아 산속에 의병촌도 만들었다. 무기를 사들이고, 부족한 무기는 직접 만들었다. 양회일을 중심으로 한 쌍산의 의병부대를 '호남창의소'라 부른다.

양회일은 능주와 화순 일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동복에서 담양을 거쳐 광주로 갈 계획도 짰다. 도마치(板峙) 전투에서 패하며 붙잡혀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신안 지도(智島)에 유배됐다가 그해 12월 풀려났다. 양회일은 강진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다시 붙잡혔다. 장흥헌병대에 갇혀 단식투쟁을 하던 중, 옥중에서 순국했다. 마을에서 멀지 않는 곳에 묘가 있다.

쌍봉마을 입구에 양회일 순의비가 세워져 있다. 태극기가 선명하게 조각된 석조기념물에는 쌍산의병들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순의비 옆에는 1897년 세워진 양팽손 신도비가 서 있다. 양팽손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한 비문이다.

순의비와 신도비를 배경으로 풍영정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이 선대의 충의와 전통을 이으려고 1926년에 지었다. 지금은 마을의 쉼터로 쓰인다.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고목과 어우러진 정자가 멋스럽다. 고목은 마을사람들이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내는 나무다. 당산제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풍영정 앞 넓은 터를 '숲의광장'으로 부른다. 일제강점기에 주민들이 학교 터로 내놓은 땅이다. 이양보통학교 부설 쌍봉간이학교가 설립됐다.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학교는 옆마을로 옮겨갔다. 교육청이 매각하려던 부지를 마을기금과 출향인 기부금으로 사들였다.

예나 지금이나 큰 자긍심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다. 절의와 기개, 자랑스런 전통이 면면이 살아있는 쌍봉마을이다. 남도가 품은 보물이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쌍봉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양회일 순의비. 태극기가 선명하게 조각된 석조기념물이 눈길을 끈다. 이돈삼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