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가요, 고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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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잘가요, 고르비
  • 입력 : 2022. 09.06(화) 17:00
  • 이용규 기자
이용규 논설실장
지난 달 30일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사설에서 '그가 가져온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고 그의 노력은 세상을 더 안전하게 만들었다'고 썼다. 이 사설에서 언급된 그는 지난달 30일 별세한 소련의 최초이자 마지막 대통령인 미하일 고르바초프이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중심에서 오늘의 세계를 만들어낸 주인공이었다. 서방에서 '고르비'라는 애칭으로 불릴만큼 각광 받았으나 러시아에서는 '소련을 허문 배신자'로 평가를 받으며, 91세로 역사의 전면에서 퇴장했다.

고르바초프는 1931년 러시아 남부의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스타브로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55년 공산당에 입당해 1985년 3월 54세에 공산당 당서기장에 올랐다. 정치국의 올드 멤버들을 은퇴시키고 옐친 등 신진 개혁 인사를 등용해 개혁을 주도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으로 서유럽의 영화와 방송을 허용하고, 종교에 대한 제한을 해제했고 스탈린의 인권 침해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공산주의 틀 속에서 개인에게 생산 수단과 소유를 일부 허용했다. 1989년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베를린 장벽 붕괴에 개입하지 않아 통일 독일과 동유럽 민주화의 물꼬를 터줬다. 급진적 개혁 정책으로 보수 군부의 반발에 한 때 실각했지만 이후 복권돼 70년간 이어온 소련 공산당을 해체했다. 그의 정치적 쇠락은 그가 발탁한 옐친에 의해서였다. 당시 군부 쿠데타를 제압한 옐친은 고르비를 무시하고 소련 해체에 이어 독립국가를 탄생시켰다. 결국 그는 1991년 12월 대통령에서 물러났고 1996년 옐친 재선을 막기위해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0.5% 지지에 그쳤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는 껄끄러운 관계였다. 특히 그의 어머니의 나라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세상에 인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며 강도 높은 비판으로 대립각을 세웠다. 푸틴은 고르바초프 장례식에 불참, 그와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서방에서는 고르비에 대해 "소련과 동유럽에 개인의 자유를 선물한 지도자"로 평가하나 러시아에서는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에 비유해 "미국에 모든 걸 양보하고 팔아넘겼다"는 비판을 서슴치않는다. 푸틴은 "소련의 붕괴를 20세기 최대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함평 출신으로 서울 관악구청장을 역임한 유종필 전 국회도서관장이 쓴 '세계도서관기행'을 보면 '러시아에 고르바초프는 없었다. 10곳의 도서관을 탐방했는데 과거 황제, 레닌, 스탈린, 옐친, 푸틴, 메르베더프 등의 족적은 접했지만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국민과 권력에 의해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오직 자신이 만든 고프바초프 재단에서만 존재한다'고 러시아와 고르바초프의 관계를 평가했다.

고르바초프는 광주와도 인연이 깊다. 한국 땅을 밟은 유일한 소련 정상인데 5번의 방한 중 2번이나 광주를 찾았다.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그는 2006년 광주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특히 대통령 퇴임후 1993년 비정부기구인 국제그린크로스를 설립해 국제적으로 환경보호 활동에 나선 그는 1995년 2월 전남일보 초청으로 광주를 방문해 '지구 환경보존을 위한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는 초청 강연을 했다. 창간부터 환경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전남일보가 '영산강을 살리자'는 대대적 환경캠페인을 벌였던 시기여서 고르비의 광주방문은 지역 사회에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단초가 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요동치는 신냉전시대에 냉전의 장막을 걷어내고 세계 평화의 길을 열고자 한 그의 용기있는 행동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고르비의 안식을 기도한다. 이용규 논설실장



이용규 기자 yonggyu.lee@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