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농민항쟁 6> 하의삼도 농민들 '민족해방 없이 토지 못찾는다" 항일연대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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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
신안농민항쟁 6> 하의삼도 농민들 '민족해방 없이 토지 못찾는다" 항일연대 투쟁
홍동현(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6)1924년 하의삼도 '토지회복' 항일연대||내땅인데 왜 돈주고 사야하나||유상매수운동 펼쳤으나 좌절||"조선·일본 민중 연대" 역설||日지주 넘어 식민권력과 격돌
  • 입력 : 2022. 05.26(목) 09:52
  • 신안=홍일갑 기자

330년에 걸친 토지탈환운동으로 유명한 신안 하의도 전경. 신안군 제공

하의3도 농민운동 관련 공적비군

하의3도농민운동기념탑

하의도 농민운동을 주제로 한 최하림 시비

하의삼도농민운동기념관

하의삼도 농민들은 조선시대 세도가, 일제시기 식민지주, 해방이후 정부를 상대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300여년 간 끈질긴 저항의 모습을 보여주였다. 특히 일제시기에는 국내외 사회주의 및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식민권력에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내 땅인데 왜 돈을 주고 사야 되나" 유상매수운동과 좌절

일제시기 하의삼도 토지문제는 하의도 농민들이 토지유상매수를 골자로 한 진정서를 총독부에 제출했다는 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공개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24년 1월 31일 동아일보 첫 보도를 시작해 5월 들어 조선일보와 시대일보에서 300여 년에 걸친 하의삼도 토지분쟁의 역사와 총독부 진정 건에 대한 진행상황을 보도했다. 이들 언론들은 하의도 농민의 유상매수운동을 지지하면서도 "누구는 하의도 농민이 아닌자런고"라며 하의도를 넘어 조선 민족 전체의 문제임을 상기시키려고 했다.

하의삼도 주민들의 유상매수 시도는 그동안 토지가 다른 사람에 매수는 과정에서 몇 차례 시도된 적 있었다. 하지만 자금조달과 도민들 사이 의견조율 문제로 인해 실패했다. 이번에도 일본인 지주 도쿠다가 동양척식회사에 토지를 팔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김응재가 중심이 돼 '삼도주민총회'를 열고 22만원에 토지를 매수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언론을 통해 도쿠다의 토지매각을 압박 하면서 한편으로는 매수비용 조달을 위해 유력인사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식민권력의 지원을 받던 도쿠다의 방해와 함께 매수를 위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유상매수운동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유상매수운동을 주도하던 김응재가 매수비용 조달을 위해 활동하던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소문과 연루되면서 그 동력을 상실하게 됐다. 결국 자신들의 땅을 왜 다시 돈을 주고 사야 하느냐는 하의도 농민들 사이 부정적인 여론을 불식시키지 못하면서 유상매수운동은 실패로 귀결 됐으며 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의도만 빼앗긴 게 아니었다-하의소작인회 활동과 해산

1920년대 하의삼도 농민들은 돈을 주고서라도 땅을 되찾겠다는 유상매수운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소작인회를 결성해 일본인 지주에 대항하며 생존권 투쟁을 이어오고 있었다. 1914년 일본인 지주 우콘과 체결한 '화해조서'를 통해 영구 소작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으나 도쿠다로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지켜지지 못했다. 농민들은 1922년 화해조서 조인을 주도했던 박응식의 아들 박장환을 회장으로 한 소작인회를 결성해 대응했다. 이들은 화해조서 불이행에 따른 소작료 납부거부 투쟁을 주도했으며 1924년 소작료 인하 등과 같은 소작 조건을 내세운 소작쟁의를 전개해 갔다. 도쿠다는 상애회 출신 친일인사인 박춘금을 내세워 섬 주민들을 회유하는 등 소작인회 활동을 방해하는 한편 일제 경찰을 동원해 소작인회 간부 수십 명을 검거했다. 이후 하의소작인회는 해체됐지만 이를 계기로 섬 주민들은 일본인 지주와 식민권력이 결탁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에 맞서 '항일' 기치 아래 다양한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뭉쳐야 한다-하의도농민조합 결성과 한·일연대

하의도 문제는 1927년 11월 일본노동농민당에서 파견된 변호사 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가 신간회 동경지회대표 강소천과 함께 하의도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또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하의도 토지분쟁과 지주 도쿠다 불법차압 문제의 불법성을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등 하의도문제에 대한 여론을 주목시켰다. 이들의 방문은 1927년 1월 30일 오사카에 조직된 '하의노동청년회'의 지원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하의소작인회 최용도다. 그는 1924년 소작인회 간부가 검거될 당시 오사카로 도피한 뒤 하의도 출신 노동자 60여명을 모아 하의노동청년회를 결성 했으며 일본노동농민당 집행위원 아사히 겐즈이(朝日見瑞)를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후루야의 방문에 이어 12월 말 일본노동농민당은 아사히 등을 보내 하의농민조합 결성을 지원 했으며 1928년 1월 2일 하의도 대리 구 학교 강당에서 하의도 주민 300여명과 함께 하의도농민조합 발대식을 열었다. 발대식에서 이들은 "앞으로 일치단결 해 조선 전 무산계급의 모든 운동과 결합하고 전세계 무산계급의 절대적인 응원 하에, 탐욕스러운 지주의 압박과 관현의 간섭을 용감하게 돌파하고 열악한 소작제도로부터 해방돼 광명의 큰길로 나아가기 위해 전진하자"고 선언했다. 이처럼 일본 사회주의 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농민조합 결성을 이끌어낸 하의도 농민들은 국내 사회주의 및 민족주의 단체들과도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200여개의 가맹단체를 거느린 전국적인 농민운동조직인 조선농민총동맹은 하의도농민조합을 지원하기 위해 박복영을 파견했다. 박복영은 암태도 소작쟁의 운동을 이끌던 인물로 하의도 주변 도서인 자은도, 도초도, 지도 등지에서 농민조합 결성을 지원하는 등 연대투쟁을 주도했다. 신간회를 비롯해 경성변호사단, 조선기자동맹 등에서도 진상파악을 위한 특파원을 파견하는 등 하의농민조합은 국내 민족운동 진영과도 연대하며 식민권력에 대응했다.

●민족해방 없이 토지도 되찾을 수 없다-하의토지회수동맹 결성과 항일연대

1928년 결성된 하의농민조합은 국내외 사회주의 및 민족주의 단체들과 연대를 통해 反지주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反총독정치와 같은 항일 연대투쟁으로 전환됐다. 이들은 1928년 4월20일 일본 오사카에서 개최된 일본농민조합 전국대회에 격문을 보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다. 우리들을 지배하는 것은 극도로 반동화한 제국주의적 절대전제정부의 출장소인 조선총독정치 그것"이라며 일제 식민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조선 전 피압박민족의 해방 없이는 일본 무산계급의 해방도 있을 수 없다. 日鮮농민대중은 단결해 저 악지주(惡地主)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계급적, 민족적 해방을 위한 조선과 일본 민중의 연대를 재차 강조했다.

1928년 5월 10일 "하의도민(荷衣島民)의 단결(團結)을 견고(堅固)히 하야 저의 토지(土地)의 회수(回收)를 필사적(必死的)으로 회수(回收)" 할 것을 목표로 한 '하의도토지회수동맹'이 일본 오사카에서 결성됐다. 회수동맹의 강령 내용이나 지향성을 보았을 때 하의농민조합과 연관된 인물들이 주도해 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하의농민조합사건'을 통해 조선총독의 실체가 드러났으며 이를 통해 하의도의 문제는 하의도만의 문제가 아닌 '전체압박피정복대중(全體壓迫被征服大衆)의 공동문제'라는 점을 명확히 밝혔다. 하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의도 주민들의 단결뿐 아니라 국내외 '피정복대중'의 지원과 연대를 강화했다. 이들은 오사카에 본부를 두고 하의도에 지부를 뒀으며 '재만동포옹호동맹' '제주도공제조합반대동맹' '조선총독폭압정치반대동맹' 등 구체적인 연대 방향을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각사회단체(各社會團體)에 격(檄)하야 하의도 문제(荷衣島 問題)를 정치문제화(政治 問題化) 하야 전민족적(全民族的)으로 항쟁(抗爭)을 확대(擴大)할 것"을 제시했듯이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계급투쟁을 넘어 항일 민족투쟁으로 완전한 전환을 선언했다.

이처럼 빼앗긴 토지를 되찾으려는 하의도 농민들의 의지는 일본인 지주를 넘어 식민권력에 맞서는 항일 연대 투쟁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신안=홍일갑 기자 ilgapho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