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농민항쟁 4)자은도 소작쟁의> 일제항쟁·해방 후 좌우대립·6·25… 갈등 치유 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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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농민항쟁 4)자은도 소작쟁의> 일제항쟁·해방 후 좌우대립·6·25… 갈등 치유 혼신
이정선·조선대 역사문화학과 조교수 4)자은도 소작쟁의||소작인회, 1924년 원만합의||문재철 등 지주, 약속 저버려||1926년 지주-소작인 대표 협정||한국전쟁 좌우대립 등 골 깊어 ||2000년 현충탑 세워 화해 나서
  • 입력 : 2022. 05.11(수) 15:14
  • 신안=홍일갑 기자

신안 자은도 충혼탑. 방통대 남기현 교수 제공

신안군 자은도 풍경. 신안군 제공

 신안 자은도(慈恩島)는 목포에서 서북쪽 해상 41.3㎞에 위치해 있다. 백길해수욕장을 비롯해 9개의 해수욕장이 있는 휴양지다. 해안 풍경과 낙조가 멋드러진 해넘이 길도 유명하다.

 최근에는 1004섬 뮤지엄파크 등 볼거리들로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목숨을 건진 명나라 장수가 섬의 자비로움과 은혜에 감탄했다고 해서 자은도라 이름 붙였다고도 한다.

 자은도는 아픈 역사를 간직한 섬이기도 하다. 해방 전후 좌우 이념 갈등이 심했고 한국전쟁기간 민간인 학살이 폭발했다. 전쟁 초기 좌익이 자은도를 장악한 이른바 '붉은 3개월' 동안 벌어진 우익 학살, 좌익에 대한 보복 학살로 2000여 명이 희생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920년대 자은도 소작쟁의는 이러한 갈등의 뿌리이자 화해의 시작이다.

 ●자은도 소작쟁의 전개 양상

 자은도 소작쟁의는 암태도 소작쟁의 영향을 받았다. 암태도 소작인들은 1924년 8월 논농사에서 수확량 대비 소작료의 비율을 40%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자은소작인회도 자은도 지주들에게 같은 조건을 요구 했으며 1924년 10월 원만히 합의했다. 소작료율은 논 40%, 밭 30%, 추가로 10%를 농업장려비로 두고 필요할 때 사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자은도 핵심 지주인 문재철, 천철호, 나카지마 세이타로(中島淸太郞) 등은 농업장려비를 교부하지 않는 등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25년 8월 신안군 각 섬 지주들은 다도농담회(多島農談會)를 구성한 후 50% 소작료율을 제시하면서 기존 합의를 파기했다. 이것이 1925~26년 신안군 섬에서 농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소작쟁의를 벌인 이유다.

 1925년 11월 자은소작인회도 40% 소작료율을 받아들인 지주에는 소작료를 지불했지만 거절한 지주에게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지불하지 않는다고 결의했다. 대신 거절한 지주들의 몫은 지정된 장소에 모아둔 후 가져가라고 통지했다.

 그러나 지주들은 소작인의 재산을 가압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2월24일 새벽 집행관은 다도농담회 사무원과 마름을 앞세워 소작인 집에 있는 벼와 곶감 1자루까지 남김없이 가압류하고 소작인의 지장까지 위조했다. 분노한 자은도민은 곤봉과 횃불을 들고 수백여 명이 모여 집행관을 쫓아냈다.

 그러자 가압류 과정에 경찰이 가담했다. 1926년 1월 초 전남 경찰부는 전남 각지의 경찰들을 비상 소집(180명 또는 270명이라고도 함)해 자은도에 파견했다. 경찰들을 저지하려다 충돌한 농민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약 40명이 검거됐다. 이 와중에도 집행관은 4조로 나눠 경찰 30명을 대동하고 가압류를 집행했다. 자은도에 파견된 경찰들이 섬의 교통과 통신을 차단했기 때문에 소작쟁의 상황이 곧바로 외부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나 목포와 서울의 사회단체가 자은도에 연대의 손길을 뻗었고 일본의 유명한 사회주의자가 응원차 몰래 자은도에 들어와 잠복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사태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경찰이 중재에 나섰다. 그 결과 1926년 1월 자은도 지주와 소작인 대표가 협정을 체결했다. 논농사 수확량을 5:5로 나눠가지되 지주는 자기 몫의 10%를 다시 소작인에 농업장려비로 교부한 다는 것이 핵심이다.

 암태도 소작쟁의에서 확보한 40%가 아닌 지주들이 내세운 50%를 소작료율로 정한 것이지만 농업장려비까지 계산하면 최종 소작료율은 45%로 절충됐다. 이로써 자은도 소작쟁의는 일단 막을 내렸다.

 ●소작쟁의 항일운동 성격과 사회주의자 '낙인'

 자은도민이 경찰과 충돌하면서까지 소작쟁의에 참여한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소작인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소작인은 고율의 소작료뿐 아니라 지주가 책임져야 할 농사 개량 비용까지 부담했다. 마름은 수확량을 자의적으로 결정해 소작료 양을 늘리고 소작인의 소작권을 좌지우지 했다.

 자은소작인회는 행동을 고치지 않는 악덕 마름은 생활권에서 축출하겠다고 경고하는 한편 주민들에게도 쟁의에 나오지 않으면 마을에서 쫓아내겠다며 참여를 독려했다. 섬 주민들의 생활공동체 의식도 소작쟁의 확산의 배경이었다.

 소작쟁의는 항일운동의 성격도 지녔다. 자은소작인회장 표성천은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 목포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서울에서 장병준에게 태극기와 경고문을 받아와서 암태소작회장이 되는 서태석에 전달했다. 장병준과 서태석이 대한민국 애국장에 서훈됐음에 비춰볼 때 표성천도 항일 민족의식을 가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표성천은 징역 1년에 처해졌고 자은도 소작쟁의 때는 5년 이내에 재범행했다는 이유로 가중 처벌돼 징역 1년2개월을 선고받았다. 소작쟁의 참가자 중 가장 높은 형량이었다.

 그러나 지주들은 소작쟁의 주도자를 사회주의자로 몰았다. 일본은 1925년 사회주의 운동 및 식민지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다. 이 분위기에 편승해 소작인회가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주의를 고취하니 엄중 단속해 달라고 요청했다.

 자은소작인회 간부 성향과 활동상으로 봤을 때 이는 분명한 모함이었다. 그렇지만 식민권력은 자은도 소작쟁의가 조선 안팎의 사회주의자와 연결되는 것을 경계 했으며 지주회의 편에 서서 쟁의를 진압하기 위한 수단을 동원했다.

 지주의 가압류 신청, 소작인의 저항에 대한 식민권력의 공무집행방해죄 적용은 지주와 식민권력의 결탁을 보여주는 제도였다. 소작쟁의가 그에 저항하다 탄압받았다는 사실이야말로 항일운동의 일종이었음을 말해준다.

 ●2000년 현충탑 세워…좌우대립 상처 극복해가길

 현재 자은중학교 앞에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 2000년 건립 당시 안내판이 없었는데 자은도민들은 화해를 위해 이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금은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안내판에 "한국전쟁과 월남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지역 어르신들의 위대한 헌신을 잊지 않기 위해서" 세웠다고 나와 있다.

 국가보훈처는 신안군 소작쟁의를 국내항일운동으로 인정, 지난해 자은도 소작쟁의에 참여한 김진운(애족장), 표생규, 양봉이, 양석암, 우판도, 성낙표(이상 대통령표창) 등을 국가유공자로 서훈했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우익 세력과 좌익으로 몰렸던 소작쟁의 주도층이 동시에 기념된 셈이다.

 아쉽게도 서로 죽고 죽이던 한국전쟁기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좌우 대립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는 일은 모든 한국인이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다.

 그 과정에서 일제시기 농민의 생존권 투쟁과 사회주의 운동도 항일운동의 하나였다는 점, 일상과 운동을 오가던 일반 주민들의 삶에 생활공동체 의식이 관통했다는 점이 화해의 실마리가 되길 바란다.

표성천 등 1920년 목포 만세시위 주도자 판결문. 장병준·서태석은 독립유공자로 인정 받았지만 표성천은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표성천 판결문

표성천 판결문

이정선 조선대 역사문화학과 조교수

신안=홍일갑 기자 ilgapho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