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유전자·서홍원> 삶의 이유 셰익스피어의 명 독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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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유전자·서홍원> 삶의 이유 셰익스피어의 명 독백(1)  
서홍원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 입력 : 2022. 01.12(수) 17:44
  • 편집에디터

지난 2017년도에 무대에 오른 뮤지컬 '햄릿 : 얼라이브'. CJ E&M/뉴시스

서홍원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이타적 유전자 시즌2가 개막되었다. 이번 시즌에는 문학의 명 구절, 명 대사에 대한 내용을 소개할 계획인데, 향후 몇 편 동안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독백을 살펴보기로 한다. 독백이란 극중 인물이 무대 위에서 혼자 하는 말인데, 관객은 독백을 통해서 극중 인물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먼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고 시작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독백에 대해 알아보자. 이 독백은 비극 <햄릿(Hamlet)>의 세 번째 독백으로서 원문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이다. 'To be'라는 동사는 삶 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문제를 담고 있어 번역이 쉽지 않은데, 최근에는 '존재', '있음' 등의 말로도 번역되었지만, 오늘의 주제는 '삶의 이유'이므로 기존의 "사느냐 죽느냐"로 번역할 생각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독백은 우리가 '죽지 못해 산다'는 내용이다.

<햄릿>은 중세 덴마크의 엘시노어(Elsinore) 성을 배경으로 한다. 덴마크는 새 왕의 등극으로 한참 축제 중인데 선왕의 아들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으로부터 현 왕이자 햄릿의 숙부인 클로디어스(Claudius)가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것을 듣게 된다. 문제는 햄릿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닌 사색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햄릿>에는 네 명의 아들이 나온다. 햄릿의 아버지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영토의 상당부분까지 덴마크에게 빼앗긴 노르웨이 왕 포틴브라스(Fortinbras)의 아들 포틴브라스(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경우는 흔하다; 햄릿의 아버지 역시 이름이 '햄릿'이다). 햄릿의 실수로 목숨을 잃게 된 폴로니어스(Polonius)의 아들 레어티즈(Leartes). 그리고 한 배우의 대사 중에 묘사된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스의 아들 피러스(Pyrrhus). 그리고 이 극의 주인공 햄릿.

나머지 세 아들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나 선대의 실추된 명예 혹은 영토의 상실을 복구하기 위해 바로 행동을 하지만, 햄릿은 숙부 클로디어스를 죽이지 않고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기기만 한다. 그 중심에 문제의 독백이 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어느 것이 더 고귀한 것인가. 어처구니 없는 운명의

돌팔매질과 화살을 견뎌내는 것과

곤경의 바다에 봉기하여 맞서면서

종식시키는 것 중에…. 죽음은 곧 잠

그 이상이 아니다. 그리고 잠은

육체가 물려받는 가슴앓이와 천 가지 자연의

충격을 종식시키는 일. 진심으로 희망하는

마무리인 것이야. 죽음은 곧 잠.

잠, 어쩌면 꿈이…. 아, 이 부분이 걸린다.

작품 밖에서 들여다 보면 햄릿의 고민은 존재 자체에 대한 작가의 철학적인 고민으로도 해석될 수 있으며 수많은 석학들이 이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작중 햄릿의 고민거리는 이 고된 삶을 버텨낼 것인가, 아니면 그냥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사이의 선택이다. 계속 들어보자.

왜냐하면 필멸의 삶을 벗어던진 후에 오는

그 죽음의 잠에서 어떤 꿈이 올 것인가가

우리를 머뭇거리게 하고, 이 때문에 너무나 길고

고통스러움 삶을 택하게 되는 이유가 있구나.

아니면 누가 시간의 회초리와 경멸을 견디겠는가,

압제자의 불의를, 거만한 자의 모욕을,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통함을, 법의 지지부진함을,

관리의 무례함을, 그리고 훌륭한 사람들이

같잖은 자들에게 받으며 인내하는 괴롭힘을,

날 선 단도 하나로 삶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도 있는데?

극의 한 가운데 위치한 이 독백에서 놀랍게도 숙부에게 살해당한 아버지의 복수에 대한 고민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확대해서 해석해보면, 햄릿이 숙부를 죽일 경우 자신도 죽을 수 있음을 알기에 고민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햄릿이 진정 바라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복수를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로부터의 해방인 것처럼 들린다. 다만 "날 선 단도 하나로" 이 모든 고통을 쉽게 끝낼 수 있는데 끈덕지게 그를 붙드는 것은 죽음의 잠 뒤에 올 꿈, 즉 그것이 길몽일지 악몽일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가 짐을 짊어지고

힘겨운 삶 속에서 끙끙거리며 땀을 흘리겠는가?

죽음 후에 있을 그 무엇이 두렵지 않다면?

미지의 땅, 그 어떤 여행자도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그 땅이 의지를 혼란케 하고,

우리가 모르는 해악들로 달아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에게 주어진 해악들을 견디게 하지 않는다면?

죽음은 "미지의 땅", 원문으로는 "undiscovered country"이다. 미지의 세계이므로 궁금하고 기대되기도 하지만 한 번 가서는 아무도 돌아오지 못한 그곳은 기대만큼 두려움도 자아내는 곳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향해 용기있게 다가서다가도 금세 방향을 틀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의식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든다.

그리고 결의의 본래 안색에 창백한 생각의

그늘이 드리워져 병색을 띄게 되며,

매우 강하고 역동적인 계획들이

이런 생각 때문에 흐름이 틀어져서

행동이라는 이름을 상실하게 되는구나.

"행동이라는 이름을 상실"한 사색의 햄릿, 그는 과연 아버지의 영혼이 그에게 부여한 복수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사색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생각들이 그의 행동을 막고 있는가?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예약하며 이만 마친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