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 나의 소원을 들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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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AR, 나의 소원을 들어줘
글=만성피로 시달리는 뚝딱좌/ 편집=어구
  • 입력 : 2021. 09.30(목) 18:27
  • 양가람 기자
스르륵. 무언가 엄청난 속도로 내 귓바퀴를 훑고 지나갔다. 지중해를 바라보며 우아하게 와인 한 잔 넘기려던 찰나였다. 내 꿈을 방해한 저 녀석을 가만두지 않겠다, 다짐하며 눈을 번쩍 떴지만 엄청나게 시커먼 더듬이를 보자 온몸이 굳어버렸다.

한참 동안 눈싸움하던 녀석이 날 비웃듯 책상 위에 올려둔 식빵으로 돌진했다.

'저건 안돼! 오늘치 내 식량이란 말이야.'

녀석보다 빨리 식빵을 쟁취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식은땀만 흐를 뿐 쉽사리 손이 뻗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휴대전화 배터리가 다 채워졌다는 알림이 울렸다.

알라딘에게 요술램프가 있다면, 내게는 휴대전화가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지니는 세 가지 소원만을 들어줬지만, AR은 배터리가 허락하는 한 무한정 소원을 들어준다.

"AR! 바퀴벌레를 잡아줘!"

순간 수십 마리 바퀴벌레가 내 방 안을 기어 다녔고, 나는 손에 들린 가상의 파리채로 녀석들을 때려잡았다. 녀석들의 더듬이 공격에도 거뜬해진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내 식량을 먹어 치우는 녀석에게 강스파이크를 날렸다.

AR(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로 번역되는 이 기술은 현실의 세계에 가상의 대상을 덧씌워 보다 많은 정보로 현실을 즐길 수 있도록 한다. VR(Virtual Reality)이 온전히 가상 세계라면, AR은 가상이 섞인 현실(mixed reality)이다.

AR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만 지운 게 아니라 인간 내면의 공포심마저 지웠다. AR 기기 하나면 바퀴벌레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던 사람도 우글거리는 바퀴벌레 떼를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게 된다. 요술램프 속 지니처럼 AR은 우리를 보다 강한, 두려울 것 없는 존재로 만들어 준다.

● AR이 100세 시대 노후 보장

치매 등 노인성 질환도 AR로 치료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VR 치료가 치매 환자의 옛 기억을 되살리는 데 집중했다면, AR 치료는 환자에게 현실감 있는 화면을 제공해 안정감을 준다.

지난해 국내 한 디지털 콘텐츠 개발 기업은 AR 기술을 접목해 맞춤형 재활 훈련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앱을 켜고 날아오는 풍선 맞추기, 스키 타며 코인 획득하기 등 다양한 게임을 진행하면, 이용자의 운동 이력과 목표량 등을 맞춤형으로 제공받을 수 있다.

AR 세상 속에서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고, 즐겁게 게임하는 것만으로도 건강한 노후를 누릴 수 있는 셈이다.

● 교과서 밖으로 위인들 불러내고

교과서에도 AR을 입히는 시도가 있었다.

미국의 학생들은 "Lessons in Herstory"라는 앱을 통해 '기록되지 않은' 여성 위인들을 소환시킨다. 역사교과서 속 남성 위인들의 사진을 앱으로 스캔하면, 역사 속에서 잊힌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왜 역사교과서엔 남성 위인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일까?"라는 질문에서 만들어진 해당 앱은 잊혀진 여성 위인들을 AR기술로 복원시켰다.

국내에서도 디지털교과서 등 AR을 활용한 교육 방법론이 다각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디지털교과서(e-textbook)는 기존 교과서의 내용을 전산화한 것으로, 문서 뿐 아니라 동영상, 애니메이션, AR 등 다양한 기능을 통합해 학습 효과를 높이는 자료다.

중학교 사회교과를 예로 들면, 학생들이 지구본 모양의 그림에 AR마커를 갖다 대면, 해당 국가의 랜드마크 3D 모형이 눈 앞에 펼쳐진다. 코로나19 시국에 세계 각국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효과도 가져오는 셈이다.

기술이 인간의 심리도 컨트롤하는 시대다. 기술이 발전할 수록 인간은 고독해진다지만, AR은 인간과 소통하는 쪽으로 진화하는 모양새다.

2021년 대한민국에는 세상에 나가기 위해 홀로 이력서와 싸우는 이들이 많다. 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지하 단칸방도, 하루치 끼니를 노리는 바퀴벌레도 아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스펙을 쌓기 위해 정작 자신의 꿈을 잊고 살아온 청년들에게는 '본인의 이상은 무엇인가'를 묻는 자기소개서와 면접이 가장 잔인하다.

AR이 취준생의 현실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세상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오랜 꿈을 다시 꺼내볼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줄 친구는 될 수 있다. 면접 울렁증을 겪는 취준생들에게, 오랜 고립감에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잊어버린 청년 알라딘들에게 AR이라는 지니를 소개시켜 주고 싶다.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