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 퇴진" 항거… 고교 학생운동 촉매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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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 퇴진" 항거… 고교 학생운동 촉매 역할
5·18 41주년 특집 ‘80년 오월 그 후’ (Ⅲ) 또 다른 영웅을 기억하는 이들 ⑤보성고 김철수 열사||1991년 5·18기념식 도중 분신 ||참교육 실현 등 학생 자유 외쳐||“청소년 민주화운동 재평가되길”
  • 입력 : 2021. 07.01(목) 17:57
  • 김해나 기자

소풍을 간 김철수 열사가 선생님과 사진을 찍고 있다. 김철수 열사 추모사업회 제공

김철수 열사가 보성고등학교 봉사동아리 '인터렉트'에 참여하고 있다. 김철수 열사 추모사업회 제공

김철수 열사(1973.3.30-1991.6.2). 김철수 열사 추모사업회 제공

"이제 세상도 많이 바뀌었으니 형이 하늘에서 편하게 쉬었으면 좋겠어요. 꿈에서라도 만나 대화하고 싶습니다."

5·18민주화운동 후 독재와 억압에 맞서 자유를 외치는 이들은 계속 늘어났다. 그중에는 참교육을 외치며 불길 속으로 뛰어든 앳된 고등학생도 있었다.

1991년 당시 보성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김철수 열사.

3남3녀 중 넷째였던 김 열사는 차분한 성격의 학생이었다.

김 열사는 보성에서 나고 자라 1989년 보성고에 입학했다. 풍물패 '솔개', 봉사동아리 '인터렉트' 등에서 활동하며 사회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고교 2학년 때 생활영어 최우수상을 받았고, 3학년 때는 모의고사 문과 수석을 할 정도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1991년 5월18일, 보성고 학생회 주최로 열린 '5·18민중항쟁 11주년 기념식' 도중 불길에 몸을 던졌다. 조용하고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소년이 참교육 실현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항거를 한 것이다. 중화상을 입은 김 열사는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같은 해 6월2일 결국 숨졌다.

김 열사는 마지막 유언으로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자기만을 위한 사회 만들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로봇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취급을 받느니 지금의 교육을 거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진실한 삶인지 생각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정의가 커져 넘치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고 말했다.

1991년 4~6월은 이른바 '분신 정국'으로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시위·분신 등이 빗발쳤던 시기다.

김 열사가 분신했던 5·18 11주년 기념식에서는 강경대 열사의 장례가 진행되고 있었다. 강 열사는 명지대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외치다 경찰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숨졌다.

장례 행렬이 망월동으로 이어질 때쯤 김 열사는 몸에 불을 붙였다. 온몸이 검게 그을린 그는 고통 속에 구급차를 타면서도 친구들에게 "잘못된 교육 계속 받을래?"라고 외쳤다.

열사의 친동생 김해수(45)씨는 형을 자신과 정반대였다고 기억했다.

김씨는 "나는 운동하거나 놀기를 좋아했다면 형은 차분하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며 "게다가 형은 문과, 나는 이과여서 나와 다른 점이 많았었다"고 말했다.

공부를 잘했던 두 형제는 귀여운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김씨는 "형과 나는 티격태격하며 서로를 무시하기도 했다"며 "형은 나에게 '너 영어 못하지?'라고, 나는 형에게 '형은 수학 못하잖아'라며 서로 놀리곤 했다"고 회상했다.

김씨는 섬세한 형의 모습도 떠올렸다.

그는 "나무를 베어 솥에 불린 후 조각칼로 사람 손, 얼굴, 경주용 차량 등을 만들어줬던 형이 생각난다"며 "목수였던 아버지를 닮아 손재주가 타고났다. 집중해서 하는 세밀한 작업에 재능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 김 열사의 죽음은 가족 모두를 슬픔에 빠뜨렸다. 특히 동생 김씨에게 형의 이야기는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 때까지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그가 방황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김씨는 "순천으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한 선생님이 '철수 동생이지?'하고 물으셨다. 사춘기라 그랬는지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고 상처를 많이 받았다"며 "서울로 간 대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과 선배 중 한 명이 형을 알고 있었다.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형에 대한 이야기가 퍼졌고, 방황했다"고 말했다.

이어 "항상 형이 큰 짐을 짊어지고 갔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면서도 "고등학교 이후로 형의 철학, 사상, 운동 등을 생각하지 않았던 상태에서 상처받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형을 꿈에서 못 본 지 4~5년은 된 것 같다. 꿈에 나온 형은 부모님께 미안해서인지 방에 들어와 등지고 있다가 그냥 말도 없이 돌아가곤 했다"며 "이제는 하늘에서 편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김 열사의 투쟁 정신은 청소년 운동의 지평을 열었다. 단순한 저항을 넘어서 전국 고등학생 운동의 촉매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현우 김철수 열사 추모사업회장은 "청소년 열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항상 어른들의 입장이다. '청소년은 자기 결정력이 약할 것이다'는 전제가 항상 뒤따른다"며 "'사춘기라서', '가정사 때문에' 등의 소문이 나돌았지만, 당시 김 열사의 분신은 절대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면밀한 과정을 거친 그만의 민주화운동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나름대로 고민하고 실천한 일이었을 텐데도 '학생 운동'은 단지 '어리기에' 무시당하는 일이 많았다"며 "김 열사가 조명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당시 청소년 운동은 사춘기 아이들의 철없는 행동이 아닌 '인간의 내면에서 가질 수 있는 정직성'으로 평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철수 열사가 친구들과 모여 사진을 찍고 있다. 김철수 열사 추모사업회 제공

김해나 기자 min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