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동자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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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어느 노동자의 아버지
사회부 양가람 기자
  • 입력 : 2021. 06.27(일) 14:11
  • 양가람 기자
양가람
"비겁하고 무기력해 보이는 껍데기를 잡고, 흔들고, 압박하면 분명 하나쯤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 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 웹툰 '송곳' 중

지난 달 28일 광주지법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사업주 박 모 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청년장애인 노동자 김재순 씨가 작업 중 플라스틱 파쇄기에 끼어 사망한 지 1년여 만이다. 산재 사망 사건에서 법정구속은 이례적인 만큼 사업장의 안전 사고 문제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주는 판결이라는 평이다.

재판정을 나서던 김선양씨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생업도 포기한 채 1년 여간 아들의 사망사고 관련 투쟁을 이어 온 김씨는 아들의 영정 앞에서 매일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아들을 영세 사업장에 취업하도록 내버려뒀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다가도, 억지로 밥숟가락을 입 안에 밀어넣으며 힘을 냈다. 수없이 무너졌지만, 계속 일어났다.

민주노총 광주본부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지난달까지 광주 9명, 전남 14명 등 총 23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반복되는 산재 속 노동계의 외침에도 산업 현장은 바뀌지 않았다. '위험 작업 2인1조', '안전장비 마련' 등 최소한의 규정도 가볍게 뭉개졌다. 모두 돈 때문이었다.

노동의 가치가 중시되지 않는 사회에서 같은 죽음은 반복된다. 기성세대에게는 '돈'이, 미래세대에게는 '대학·취업'이 노동 인권보다 더 중요하다. 어렵게 교실에서도 노동수업을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지만, 취업을 앞둔 소수 직업계고 학생들만 노동 인권을 정식 교과로 배운다.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노동 인권 교과는 인문계고에 단 한 시간도 배정되지 않는다. 미래에도 노동 인권은 헌법 안에만 존재하는 선언적 외침에 그칠 지 모른다.

"노동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는 그 날까지 끝까지 투쟁하려 합니다."

가슴 깊이 아들을 묻은 김씨는 이제 사회운동가가 되어 또다른 재순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송곳같은 사람들의 투쟁 덕에 우리 사회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포기하고 피눈물 흘려야 할 지 알 수 없다.

이제는 정치권이 응답할 차례다. 5인 미만 사업장 적용을 제외시키는 등 '누더기법'으로 전락한 중대재해처벌법부터 개정해야 한다. 더 이상 한 노동자의 죽음에 그 가족들까지 쓰러지게 할 수는 없다.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