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었다면 경찰이 됐을 내 친구 성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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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었다면 경찰이 됐을 내 친구 성용이"
●5·18 41주년 특집 '80년 오월 그 후' (Ⅲ) 또다른 영웅을 기억하는 이들 ③조대부고 박성용 열사||옛 전남도청 최후 항쟁 참여 후 숨져||친구 "과묵했지만 불의 못 참는 친구"||동창회, 추모비 세워 오월 정신 기려
  • 입력 : 2021. 06.17(목) 17:19
  • 김해나 기자

조대부고 교정에 서있는 박성용 열사(왼쪽)와 동창생 이의철씨. 이의철씨 제공

1980년 5월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박성용 열사.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 제공

"고교 3년, 어린 나이에 인생의 꽃을 못 피운 채 세상을 등진 친구가 늘 안타깝죠. 지금도 그립고, 앞으로도 기억할 겁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41년이 지나도 그때 그들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얼굴은 희미해도 목소리, 말투, 그들이 가졌던 꿈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열사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기억의 끈을 자신에게 더욱 동여매고 있었다. 마치 기억을 놓아버리면 희생된 열사와 정말 이별해야 할 것만 같아서다.

1980년 5월 당시,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박성용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박 열사는 당시 학동 파출소가 불타는 장면을 목격했다. 공수부대가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것을 보고 울분을 토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우리 학교를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같은 국민, 민족을 어떻게 함부로 죽일 수가 있느냐"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보고만 있으란 거냐.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박 열사는 가족들의 걱정과 만류에도 자주 집을 나가 시위 현장을 돌아다녔다. 그는 계엄군의 잔혹한 만행을 보고만 있지 못하고 시민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80년 5월21일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에도 그는 쓰러진 시민을 돌봤다. 그해 5월26일, 다시 집을 나선 박 열사는 도청에서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5월27일 박 열사는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설득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이날 도청에 진입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박 열사의 동창 김성용(60) 씨는 그를 강직하고 과묵한 친구로 기억했다.

김씨는 "성용이는 당시 고등학생치고 키가 컸다. 키순으로 번호를 매겼는데 60여명 중 57번 정도 했던 기억이 난다"며 "사복을 입혀 놓으면 성인처럼 보일 만큼 좋은 체격과 얼굴에 풍기는 강인한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박 열사는 보통 고등학생들과 같이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우정을 쌓고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김씨는 "덩치가 크다고 급우를 괴롭히는 일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다른 반에서 우리 반 애들을 괴롭히면 '하지 마라'며 물리치던 듬직한 친구였다"며 "지금 돌이켜보면 나이답지 않게 생각이 많고 어른스러웠다"고 기억했다.

이어 "성용이가 살아 있었다면 경찰이 됐을 거 같다. 경찰이 되고 싶다고 얘기하기도 했고, 몸집이 좋고 정의감 넘치는 친구였으니 말이다"며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다른 동창생 전주호(60) 씨도 박 열사를 주관이 뚜렷한 친구라고 말했다.

전씨는 "성용이는 생각이 흔들리지 않았다. 일을 추진할 때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직하게 추진하는 친구였다"며 "그날 계엄군과 싸워 이길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는 그런 '배짱'은 성용이니까 가능한 것이다"고 말했다.

동창생 이의철(58) 씨는 자신의 자취방에서 박 열사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이씨는 "성용이는 리더십이 강한 아이였고, 성격이 좋아 인상 쓸 일도 그냥 '씨익' 웃어버리는 친구였다"며 "고교 2학년 때 성용이와 24시간 붙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친했다. 성용이가 친구들한테 화내는 것을 못 봤다"고 말했다.

이씨는 1980년 5월 공수부대가 광주에 오기 전 박 열사와 데모에 참여했었다. 그리고 5월18일 휴교 이후, 그들이 갈 곳은 도청밖에 없었다.

이씨는 "도청 주위를 돌아다니다가 상무관에서 시신을 봤다. 성용이 성격에 주위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이건 아니다'고 분노했을 것이다"며 "안 그래도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인데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다. 그 분노로 도청을 지킨 것이다"고 회고했다.

친구들은 박 열사의 사망 소식을 휴교령이 끝나고 학교에 가서야 알게 됐다.

이씨는 "전라도 말로 '얼척'이 없었다.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가버린 친구 소식을 들으니 너무 안타까웠다"며 "5·18을 생각하면 아직도 울분이 치솟는다. 우리 세대에서 5·18 진상규명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조대부고 30회 동창인 이들은 지난해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모교에 박 열사를 기억하는 추모 기념탑을 세웠다. 이들은 "성용이 덕분에 우리 기수의 흔적이 교정에 제일 많다"며 친구를 그리워했다.

교련복을 입고 가을 행군(소풍)에 나선 박성용 열사(왼쪽)와 동창생 이의철씨. 이의철씨 제공

김해나 기자 min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