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출근 두달 앞두고 '오월의 별'이 된 고3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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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출근 두달 앞두고 '오월의 별'이 된 고3 소녀
●5·18 41주년 특집 ‘80년 오월 그 후’-(Ⅲ) 또 다른 영웅을 기억하는 이들 ②송원여자실업고(현 송원여상) 박현숙 열사||주남마을 집단발포 현장서 숨져||어릴적부터 남다른 리더십 보여||“동생의 죽음, 한 가정이 무너져”||“책 읽기 좋아했던 똑똑한 친구”
  • 입력 : 2021. 06.15(화) 16:01
  • 김해나 기자
1980년 5월 신의여자고등학교(현 송원여상) 3학년이었던 박현숙 열사.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 제공
"책을 좋아하고 참 똑똑한 아이였어요. 지금은 슬픈 마음보다 친구가 자랑스러운 마음이 큽니다."

1980년 5월,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외치다 산화한 수많은 이들.

그리고 41년이 지나도록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며 '눈물마저 말랐다'고 표현한다.

허나 그 진득한 슬픔 이면에는 그들의 희생으로 이뤄낸 '민주주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도 자리하고 있다.

1980년 5월, 꿈 많던 한 소녀가 있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송원여자실업고(현 송원여상) 3학년이었던 박현숙 열사.

시민군 활동을 하던 박 열사는 1980년 5월23일 관을 구하기 위해 화순에 가고 있었다. 버스가 주남마을을 지날 때쯤 계엄군의 총격에 숨졌다.

주남마을은 광주에서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에 있어 계엄군이 광주에 들어오거나 나가는 차량을 차단하는 주둔지가 됐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화순으로 향하던 미니버스에 탄 이들에게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했고, 버스에 탔던 이들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숨졌다.

3남 5녀 중 둘째 딸이었던 박 열사는 항쟁 당시 광주 동신전문대 앞에서 자취를 했고, 박 열사의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은 담양 남면에 살고 있었다.

1980년 5월20일, 광주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리를 듣고 담양에서부터 걸어서 광주에 간 박 열사의 아버지는 박 열사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박 열사가 "며칠 있으면 학교도 가야 하니 여기 있을게"라며 아버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 박 열사는 참변을 당했다.

박 열사와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나 절친한 친구로 지냈던 고정순(60) 씨는 박 열사에 대해 '노래를 잘하고 책을 많이 읽던 친구'라고 말했다.

정순 씨는 "엄마 생신 때 현숙이를 불러 노래를 시킨 적이 있다. 너무 구성지게 노래를 해서 현숙이가 떠났어도 엄마가 현숙이 얘기를 많이 했다"며 "나는 당시 노래를 못해서 현숙이에게 김태곤의 망부석, 백영규의 잊지는 말아야지 등의 노래를 배웠다"고 회상했다.

정순 씨는 박 열사의 시신을 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박 열사가 사망했을 당시 주민등록증이 나오지 않을 나이였다. 등록된 지문이 없어 가족들은 석 달이 지나도록 생사조차 모른 채 애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순 씨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한구의 시신이 입고 있던 옷으로 박 열사를 알아냈다.

정순 씨는 "나는 검정 계열의 옷을 좋아했고, 현숙이는 화려한 옷을 즐겨 입었다. 선물 받은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아 현숙이를 줬고, 그 옷을 입은 채 총을 맞았던 것"이라며 "현숙이 여동생이 옷을 보고 '우리 언니 맞다. 이거 언니 친구가 준 옷이다'고 해서 시신을 찾았다"고 말했다.

박 열사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집안 사정상 빨리 취업을 해야 했고, 부모님의 바람대로 은행원이 되기로 했다. 박 열사는 그해 7월부터 은행에 출근하기로 했었다.

박 열사의 언니인 박현옥 5·18유족회 사무총장은 "우리 현숙이는 부모님을 존중해서 꿈을 바꾸던 아이였다"며 "그날 아버지가 데리러 가셨을 때도 '아빠, 두 달만 기다려. 내가 호강시켜드릴게'라고 말했다"고 떠올렸다.

실제로 박 열사는 어린 나이임에도 타자, 주산 등 수많은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작가의 꿈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표현력도 남달랐다. 그리고 불의에 강하게 저항하는 소녀였다.

박 사무총장은 "5·18 당시 집이 교도소 입구와 가까워서 매일 군인들이 지나다녔다. 현숙이가 저녁에 빨래를 하고 있으니 옆방 아주머니가 '군인들이 소리 들으면 죽으니까 오밤중에 빨래하지 마라'고 했다. 동생이 '아줌마, 저는 저 나쁜 놈들이 무섭지 않아요'라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며 박 열사의 저항 정신을 떠올렸다.

이어 "현숙이가 죽기 한 달 전쯤이었다. 취업을 앞둔 동생이 멋을 부리고 싶은 마음에 옷을 사달라고 했다. 너무 비싸 사줄 여력이 안 돼서 다른 옷을 사줬다"며 "현숙이가 죽고 옷장을 정리하는데 그 옷이 포장된 그대로 옷장에 들어있었다. 그야말로 '환장'하겠더라. 동생이 입고 싶어 한 옷을 못 사준 것이 너무 후회됐다"고 말했다.

박 열사의 가족은 국가폭력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당시 박 열사의 부모님은 딸을 데려오지 않고 광주에 남겨놨다는 이유로 매일 다퉜다. 어린 동생들 역시 언니·누이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매일 싸우는 부모님을 보며 원망도 했다. 또 당시에는 '폭도'라고 불리고, 동네에서 배척당하고, 친척들과 연도 끊으며 암울하고 고립된 생활을 하기도 했다.

박 사무총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공든 탑이 무너졌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현숙이가 살아있었다면 우리 가정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다"면서도 "올바른 민주주의를 외쳤던 동생의 죽음이, 오월 열사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1980년 5월이 재평가 받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김해나 기자 min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