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온기가 느껴지는 잊혀진 영웅들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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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온기가 느껴지는 잊혀진 영웅들의 기억
라미 현, 참전용사들의 이야기 사진으로 기록||우애, 자유, 웃음, 눈물 등 일상의 가치 담아
  • 입력 : 2021. 06.10(목) 16:03
  • 박상지 기자

사진작가 라미 현이 참전용사들의 전쟁에 대한 기억을 에세이로 펴냈다. 책 발췌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라미 현 | 마음의숲 | 1만6000원

화합보다는 갈등이 보도되고, 역사보다는 정보의 가치를 중시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세대 간의 갈등 문제는 매 순간 존재하던 담론이지만, 오늘날 그 갈등이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특히 다른 국가보다 사회적 변혁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던 한국에서 '세대'는 더욱 면밀하게 세분된다. 참전용사 세대, 산업화 세대, X세대, 밀레니얼 세대, 그리고 Z세대까지. 세대를 구분 짓고 특성을 분류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기 쉽다. 그 결과 윗세대의 조언과 기록된 역사는 '낡고 지루한 것'이 되어버렸다.

세대 간의 이해가 부족해진 요즘,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떠난 젊은 사진작가가 있다. 신간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의 저자 라미 현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받들고, 윗세대의 조언과 기록이 다음 세대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참전용사가 증언하는 '생생한 전쟁사'를 기록해 전달한다는 숭고한 생각으로 저자는 프로젝트를 이어나간다.참전용사들이 품고 있던 전쟁에 관한 기억을 역사에 위치시켜 다음 세대에 전달하겠다는 사명의식으로, 그들의 사진과 이야기를 치열하고 꼼꼼하게 기록했다.

전쟁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결국 전쟁도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전쟁사에 주목한 이유다. 책에는 연도와 사상자의 수치로만 기록되는 '종이의 전쟁사'보다는, 문맹인 전우 대신 편지를 써주고 돌아오는 답장에 함께 기뻐하는 '사람의 전쟁사'가 가득하다. 삶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 기록들에서 잊힌 영웅, 잊힌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깨달을 것이다. 전쟁 같은 일상에 치여 잊어버렸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우애, 자유, 웃음과 눈물 그리고 소중한 사람까지.

저자의 기록은 교과서에서 보았던 지루하고 딱딱한 전쟁사와는 다르다. 영웅의 후일담 혹은 꼰대의 '나 때는'으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참전용사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드라마다. 그리고 드라마의 갈등이 결국 해소되듯, 치열하고 생생한 참전용사의 기억에서 우리는 세대 갈등을 봉합할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참전용사들이 옆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다가도, 막상 그들의 사진을 찍으면 눈빛에서 전장의 싸늘함을 읽어낸다고 고백한다. 당연하게도 전장에서 겪은 슬픔이 기쁨을 압도하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한 그들은 죽음을 경험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 '간접 체험'의 힘은 강력하다. 겪어본 적 없는 거대한 슬픔을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우리는 삶의 가치를 되새긴다.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저자는, 그들이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생환자이지만 역사의 승리자가 아님을 몸소 느낀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기록이 남는 한 누구나 역사가 된다. 잊히지 않고 무사히 역사가 된 기록은 다음 세대에 어떻게든 메시지를 던진다. 반전(反戰), 자유, 평화 등 잊지 말아야 할 인류의 가치를 길어 올릴 수 있다.

저자는 오늘도 새로운 역사를 발굴한다. 이 사소하다면 사소한 기록이 인류의 유산이 되리라는 사실은 의심할 필요도 없겠다.

박상지 기자 sangji.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