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향기·김강> 누가 '얌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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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향기·김강> 누가 '얌체'인가
김강 호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 입력 : 2021. 06.08(화) 13:30
  • 편집에디터
김강 호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어릴 적 나는 '얌체'라 불리었다, 오직 외갓집에서만 통용되던 비밀스런 별칭이었다. 그것도 외할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독점적 호칭이었다.

절친들은 대신에 나를 '강가딘'이라고 불렀다. 다른 애들보다 피부가 더 까무잡잡해서 받은 훈장이었다. 강가딘은 시커먼 머리가 특징인 탐정 강아지로 당시 만화가 김 삼 화백이 연재한 '소년 007'과 함께 대박인기를 누린 코미디 만화 '슈퍼스타 강가딘'의 주인공이다.

얌체 스토리는 대충 이러했다. 아마도 외출 중 기분 좋은 술을 드신 외할아버지는 귀가 후 마루에 앉자마자 나를 찾으시고는 느닷없이 "누가 얌체냐?"라고 물으셨다. 그러면 나는 지체 없이 거수경례를 붙이며 "예, 강이가 얌체요!"라고 천정이 무너질 듯 큰소리로 외쳤다.

진지한 반사작용이 재미나고 오지신 외할아버지는 그때마다 껄껄껄 파안대소하셨다. 그런 다음 무릎에 앉히고 꺼끌꺼끌한 수염을 나의 여린 볼에 마구 비비셨다, 야릇한 술 냄새와 따가운 촉감 때문에 궁극의 인내가 필요했지만, 기운차고 절도 있는 손자의 대답에 당연히 주어지던 보너스였다. 외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난 지 상당히 지난 지금도 문득 그때가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뺨을 더듬으며 그 생생했던 순간을 애절히 추억한다.

별명과 관련해서 한 가지 미스터리는 내가 무슨 이유로 얌체가 되었는지 여태껏 모른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이모와 삼촌들도, 심지어 내 어머니도. 그저 그 별명에 별다른 사연이 없어서일까.

당시 외갓집은 지금 유스퀘어 터미널 건너편 광천동에 있었다. 내가 사는 유동 삼거리에서 20번 버스를 타면 거의 한 시간여 걸렸다. 아스팔트는 길 한가운데에만 깔려있어서 버스가 승하차를 위해 길가로 출입할 때마다 노란 흙먼지가 봉화처럼 하늘을 타고 올랐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한 달에 한번 정도 외갓집 '순례'를 다녔었다.

외가는 대식구였다. 외할아버지는 슬하에 5녀2남을 두셨다. 밤에 잘 때면 이미 출가한 딸들을 빼고도 단골손님격인 나까지 합해서 모두 예닐곱 이상이 제일 큰방에 일렬로 누워야만 했다. 마루 구석 요강을 찾는 길에 발길을 주시하지 않으면 자칫 초대형 압사사고로 이어질 형국이었다. 식사도 밥상 두 개가 차려졌다. 여러 식구가 함께 둘러앉아 먹었던 꽁보리밥과 청국장이 지금도 내 입맛의 베스트가 된 것은 분명 외가만찬의 덕분이리라.

집에 가족이 많다는 것은 어린 내게 더없는 낙이었다. 이모와 삼촌들 사이를 탁구공처럼 오가며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더구나 내 어머니는 맏딸이었으니, 나는 큰손자로서 외가의 귀한 '강아지'였다.

사전에 따르면, 얌체라는 말은 본래 염치의 작은 말인 '암치'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염치란 청렴하고 깨끗하여 체면을 차릴 줄 알며 스스로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한다. 따라서 염치없다는 말은 자신의 언행이나 처신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경우를 일컫는다. 이처럼 염치없는 사람, 즉 암치없는 사람을 얌체라고 부른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서슴치 않으면서도 사리에 어긋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을 지칭한다.

외할아버지는 외손자의 버릇없는 '어린냥'이 마냥 귀엽고 대견한 나머지 얌체라는 별명으로 당신의 감정을 승화시킨 게 아닐까.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

비단 어디 그 어린 얌체뿐이던가. 주위를 돌아보니 자신의 생계와 생존, 그리고 편의를 위해 불법을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악덕들이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타인의 피해가 어찌 자신의 복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고수얌체족이다.

LH투기, 세종특공, 의료계 대리수술, 육군 부실도시락과 공군 성추행, 법무차관 택시기사 폭행 등 부패와 불의로 나라가 끙끙 앓는 중이다. 거기에 오락가락 부동산 정책과 종부세 과다증세, "법치완박" 검찰인사에 여당의원 투기의혹까지 덮치니 2030 세대는 이곳을 살만한 나라로 여기지 않는다. 이 판국에 한류역군 BTS가 고소한 Butter를 발라준들 도망갔던 밥맛이 금새 살아날까.

얌체들은 무궁한 후안무치의 염력으로 이 '불'편한 세상을 부정과 불평등으로 염색한다. 이들은 언제든 어디든 염치를 위장하는 변신에 능할 것이다. 장차 닥쳐올 우리 '조국의 시간'을 숨차게 압박한다.

대체 누가 얌체냐!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