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갑오년 농민들은 왜 파랑새를 지어 불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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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갑오년 농민들은 왜 파랑새를 지어 불렀을까
참요(讖謠) 파랑새 ||동학의 노래라 불리는 '파랑새요'||같은 조 같은 가락 달라진 노랫말 ||시대적 맥락 속 숨은 뜻 들어 있어||세상 모든 소리 들어 아는 '관음조'||천리 밖 소리 들어 길흉화복 꿰뚫어||봉건사회 뿌리째 뒤흔든 동학운동||다시금 파랑해 노래를 흘얼거린다
  • 입력 : 2021. 05.13(목) 16:27
  • 편집에디터
2019년5월17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주관으로 5·18민중항쟁 제39주년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추모제에 참석한 오월 어머니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사찰에 극락보전을 지었다. 벽화를 그려야 할 차례였다. 마침 한 노인이 찾아왔다. "내가 이 법당의 벽화를 그리겠다. 그 대신 49일간 절대로 이 법당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주지스님이 수락은 하였지만 보지 말라 하니 궁금증이 일었다. 마지막 날이 되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가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살짝 들여다봤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림 그린다던 노인은 온데 간 데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벽화를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주지스님이 법당문을 열고 들어가자 깜짝 놀란 파랑새가 붓을 입에 문 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강진 무위사에 내려오는 전설이다. 그림을 그리던 파랑새가 날아가 버렸으니 화룡점정(畵龍點睛), 점안식을 못한 셈이랄까. 그래서 지금도 무위사 극락보전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사찰의 파랑새 설화는 전북 부안 내소사의 대웅보전 설화나 낙산사 및 홍련암 등이 유명하다. 의상대사가 한 곳에 참배를 하다가 푸른 새를 만났다. 갑자기 새가 석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의상이 그곳에서 7일 동안 기도를 하였다. 비로소 바다에 붉은 빛의 연꽃이 솟아올랐다. 관음보살의 현현(顯現)이었다. 지금의 낙산사 혹은 홍련암이 생긴 내력이다. 내소사에는 호랑이가 사찰을 짓고 파랑새가 단청(丹靑)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남녀노소 모르는 이 없이 잘 알려진 우리 민요다. 대개 '파랑새노래'라고 한다. 항간에서는 여기서의 파랑새를 1894년 아산만에 상륙했던 청나라 군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청나라이니 파란색이라는 뜻으로 이해한 듯하다. 녹두밭은 동학당이고 청포장수는 서민대중이며 녹두꽃은 전봉준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전봉준의 어릴 때 이름이 녹두였다니 녹두꽃을 녹두장군에 비유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머지 풀이들은 견강부회적 말맞추기일 가능성이 높다. 대개 한자말을 우리식으로 풀어쓸 때 이런 잘못을 많이 범한다. 청나라는 푸를 청(靑)이 아니라 맑을 청(淸)을 썼다. 발음의 유사성을 고려하더라도 청나라군사에 비유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노래는 이렇게도 불린다. "새야새야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파랑새'의 자리에 '녹두새'가 배치되었다. 이 노래로 보면 녹두새(파랑새)는 전봉준을 가리킨다. 정 반대의 해석인 셈이다. 같은 곡조 같은 리듬인데 여러 가지 노랫말들을 바꿔 불렀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노래여서일까? 당대 민중들의 수요와 욕망들이 달라서였을까? 그래서다. 동학의 노래라고도 불리는 '파랑새요'를 상고할 때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단순한 댓구로 가져다 쓴 용어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인용하는 배경, 행간의 숨은 뜻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랑새와 관음조(觀音鳥)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이해 내 콩 밭에 머물렀던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내 콩 밭의 파랑새야......" 필사본 에 나오는 '청조가' 즉 파란새 노래다. 가사를 보면 동학의 '파랑새노래'와 거의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파랑새가 그렇고 콩밭이 그렇다. 여기서의 파랑새는 사다함의 연인 미실이다. 정민 교수는 이 노래가 위작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자체의 위작 가능성이 분분하니 크게 강조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파랑새노래의 연원은 신라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설화적 맥락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황해북도 고달굴 전설에 관음조(觀音鳥)가 나온다. 여기서의 관음조가 곧 파랑새다. 낙산사와 홍련암이 우리나라 관음의 최대 도량이라는 점에서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가 천부관음을 조성하고 얻은 아이가 자장이라는 이야기와 경덕왕 때 천수관음에게 빌어서 눈먼 아이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6세기 무렵이니 어쩌면 '파랑새 노래'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오를지도 모른다. 설화적 내력으로만 본다면 강진 무위사나 부안 내소사 등도 관음도량이다. 관음(觀音)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준말이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 알 수 있는 보살이다. 청진기를 대지 않고도 천리 바깥의 소리 들어 사람의 길흉화복을 꿰뚫어본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생겨난 당대 민중들의 조바심이 직조해낸 것이 동학의 파랑새 노래 아닐까? 김익두가 펴낸 〈전북의 민요〉에는 또 다른 노랫말이 소개되어 있다. "새야새야 무당새야/ 미륵산에 앉지 마라/ 샛바람이 부는 것이/ 눈동자를 가릴러라." 무위사에서 점안식을 하지 못하고 날아 가버린 파랑새가 저잣거리에 들어 무당새가 되었던 모양이다. 식자들이 지어 좀 어렵긴 하지만 이들 모두를 참요(讖謠)라 한다. 여기서의 무당새, 미륵산, 눈동자는 전봉준, 녹두꽃, 동학으로 소급되며 곤핍한 이승을 구원할 관음으로 환원된다. 좌절된 혁명, 실패한 전쟁이었을까. 봉건사회를 뿌리 채 흔들었던 그 정신이 유효하다면 어쩌면 동학은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파랑새 노래를 흥얼거려봐야겠다.



남도인문학팁

오월의 참요(讖謠)

흔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뿌리를 동학농민혁명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이 봉건사회에서 근세사회로 넘어가는 절절한 전쟁이었다면 5.18 또한 부조리한 군부의 압제와 질곡으로부터 민주사회로 넘어가는 치열한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시기 불린 노래들을 에둘러 참요(讖謠)로 해석할 수 있다. 풀어 말하면 미래의 일에 대한 주술적 예언을 주제삼은 노래다.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노랫말들로 구성된다.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암시한 나 조선의 건국을 암시한 , 동학혁명기의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5.18 기간에 불린 수많은 노래들이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42권을 참고한다. 김선출 진술서에는 투사의 노래, 우리의 소원, 우리들은 정의파다 등의 노래가 불렸다. 최병진 수사조서에는 정의가, 투사의 노래, 봉선화, 우리의 소원은 통일, 흔들리지 않게, 내게 강 같은 평화, 새 나라의 어린이, 그 때 그 사람 등이 이른바 노가바(노래 가사 바꾸어 부르기)로 불렸다. 이외 시위와 투쟁 현장에서 불린 많은 노래들이 있었다. 항쟁이 끝나고 김종률이 지은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정태춘의 '5.18(잊지 않기 위하여)'까지 또 수많은 노래들이 만들어지고 불렸다. 다시 파랑새를 생각한다. 갑오년 농민들은 왜 파랑새 노래를 지어 불렀을까. 단지 전봉준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염려였을까. 처형에 대한 애절한 반응이었을까. 적어도 이 노래를 참요의 범주에 넣고 해석하려 한다면 그것은 신라로 거슬러 오르는 관세음보살과 고려의 건국, 조선의 건국을 암시했던 민요들에 가 닿을 수 있어야 한다. 보다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기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시방 5.18의 노래를 어떻게 소비하거나 재구성하고 있는 것인지. 구시대를 비판하고 새 세상을 준비했던 그 노래, 참요 말이다. 다시 어떤 노래를 불러야할 것인지 녹두장군 파랑새 노래에 비춰 길을 묻는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