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유전자·서홍원> 에토스, 말할 수 있는 자격 : 여자의 몸, 왕의 심장의 엘리자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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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유전자·서홍원> 에토스, 말할 수 있는 자격 : 여자의 몸, 왕의 심장의 엘리자베스 1세
서홍원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 입력 : 2021. 05.05(수) 14:55
  • 편집에디터
서홍원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오늘 이야기는 연사가 청중에게 호소하는 방법 세 가지 중 에토스(ethos), 말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한 것이다.

1588년 어느 날 스페인은 약소국가 영국을 향해 대함대 무적함대(Spanish Armada)를 출범시킨다.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은 강력한 해군으로 중남미의 금과 보석을 유럽으로 들여오며 패권을 잡았다. 그리고 이를 욕심내며 지켜보던 나라들이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영국이었다.

스페인과 영국은 헨리 8세의 첫 부인, 스페인의 공주 캐서린과 이혼을 단행한 후 관계가 악화됐고, 헨리의 딸 엘리자베스가 1558년에 등극한 후에 두 나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런 대립은 해상에서도 나타났는데, 영국은 왕실 함대와 더불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선박들을 허가하고, 필요할 경우 전쟁 등에 동원하는 형태의 해군을 두었다. '개인의 이익'을 영어로 말하면 Private interest이고 이런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프라이버티어 (privateer)라고 할 수 있으니 프라이버티어는 필요에 따라 해적으로 탈바꿈하기도 했으며(사실 해적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들이 노린 것은 중남미와 유럽 간의 해상로에 있는 스페인 무역선들이었다.

프라이버티어들로 인해 스페인의 인내심이 거의 닳아 있던 와중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가 1581년 독립공화국을 선포하고 영국이 이를 지지하자 1588년, 스페인은 130척의 대함대를 보내어 영국을 벌하려 했다. 이에 맞선 영국 함대의 수는 200척 정도였으나 실제로는 스페인 화력의 반 정도밖에는 안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영국의 해안가에서는 스페인의 상륙을 대비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그중 런던 동쪽에 있는 템스 강 어귀의 틸버리 마을에서 전쟁 준비 중인 병사들 앞에 여왕 엘리자베스가 모습을 드러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사랑하는 백성들아, 어떤 이들은 우리(여왕 본인을 지칭)에게 우리의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설득하였다. 무장한 군중 사이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다시 생각하라고. 반역을 두려워하라고."

등극한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톨릭 세력의 반란을 두려워해야 하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처지가 엿보이는 말이다. 특히 스페인의 침공이 눈앞인 지금, 영국 가톨릭 신자들의 내란까지 우려한 말일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여왕은 왕을 지칭하는 복수 '우리'를 버리고 개인으로서 백성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대명사 '나'를 택하여 연설을 계속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나는 나의 충성스러운, 나를 사랑하는 백성들을 의심해가면서 살아있기를 원하지 않노라. 독재자들이나 두려움에 떠는 것일지니!"

자신이 충성스러운 백성들을 믿고 그 백성들을 위해 이 전쟁터에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왔음을 밝히는 여왕의 모습은 스페인의 침공을 앞에 둔 병사들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여왕은 이어서 영국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긴다.

"나는 내가 한낱 힘없고 나약한 여성의 몸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왕의 심장과 배심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것도 영국 왕의 것을."

여왕이기에 백성으로부터 무시, 의심, 배척을 받은 엘리자베스는 여성의 몸이라는 약점을 왕의 심장과 배심이라는 강점으로 덮어버리면서 비로소 여자이자 왕으로서의 에토스, 말할 자격을 획득한 것이다. 왕을 지칭하는 대명사 '우리'를 아무리 내세웠어도 얻지 못했던 자격을.

우연인지 신의 가호가 있었던 것인지, 스페인 대함대는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와 영국해협의 폭풍으로 인해 국력을 쇠락시킬 정도의 피해를 입고 물러나게 되고, 이후 영국의 문화는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엘리자베스시대'는 영국문학사에서 가장 부흥했던 시대를 일컬으며 이때 셰익스피어의 작품 대다수가 등장한다. 여왕의 에토스가 영국 전체에 미치는 힘이 이렇듯 대단한 것이다.

이제 5월이다. 가정의 달이기도 한 이달은 우리의 아픈 과거를 상기하는 달이기도 하다. 오늘의 에토스 이야기는 200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20주년을 맞아 광주 시민들을 향한 김대중 대통령의 기념사의 일부로 마무리 짓겠다.

"제가 광주의 비극을 처음 알게 된 것은 5·18항쟁이 일어난 지 40여일이 지나서였습니다. 5·18 하루 전 군사정권에 연행되어 40여일 동안 모진 박해를 받던 중 당시 군부의 실력자 한 사람이 전해 준 묵은 신문을 보고서야 비로소 광주에서 있었던 천인공노할 참상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략) 저는 그때 결심했습니다. 가신 임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분들의 뒤를 따라 정의롭게 죽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만이 민주영령과 국민, 그리고 역사 앞에 영원히 사는 길이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들에게 협력하기만 하면 대통령을 빼놓고는 어떠한 직책이라도 주겠다는 군부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사형선고의 확정판결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본인도 군부로부터 모진 고문과 사형선고까지 받았기에, 또한 뒤늦게 알게 된 광주시민들의 희생을 마음에 새기며 '정의롭게 죽는 것 뿐'이라는 각오로 민주주의를 지켰기에 20년 후에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내세운 에토스,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