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 가둬놓고 전두환 찬양 강요… 구타에 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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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 가둬놓고 전두환 찬양 강요… 구타에 욕설"
5‧18 41주년 특집 '80년 오월 그 후'- (Ⅰ) 강‧녹‧선이라고 부르던 지옥 ||③ 피해 생존자의 목소리||전남대 안원균 관리번호 2363번||1983년 학내 시위하다 강제징집||내 힘들었던 청춘 생각하면 억울||숨기고 싶은 생활, 가족도 모르죠
  • 입력 : 2021. 04.20(화) 17:00
  • 도선인 기자
1983년 11월 전남대서 시위하다 강제징집된 관리번호 2363번 안원균 씨.
"데모하다 사복경찰에 잡혀서 결국 서부경찰서로 끌려갔제. 3~4일 잠을 못 자게 하더라고. 야구장에서 밤 경기할 때 쏘는 조명을 24시간 틀어놓는 거야. 경찰이 데모 주동자 이름 대라고 하는데…. 죽도록 맞다가, 결국 군대나 가라는 거야. 비몽사몽 정신에 눈떠보니 31사단 훈련소였어. 그때부터 광주 놈이란 이유로 고생이 시작됐지"

안원균(58) 씨는 5·18민주화운동을 겪고 1982년 전남대학교에 입학했다. 사회조사연구학회에 가입해 소위 말하는 학생운동을 했다. 어느 날 지명수배까지 되어 있었다. 당연히 전두환 정권 당시 강제징집 대상자였다. 관리번호도 있었다. 2363번.

신군부 논리에 따르면 안 씨는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므로 분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사회와 분리되는 곳, 바로 군대였다.

"재미로도 절대 군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가끔 군대에 간 정식기록이 없다고 관계자들이 따지는 꿈을 꾼다. 그러면 국방부에 가서 강제징집된 거라고 설명해야 하나, 진짜 또 군대 가라 하면 어쩌지. 참 바보스러운 생각에 잠긴다"고 당시를 떠올리며 안 씨는 담담하면서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영문도 모른채 군대에 끌려가기 전날도 그는 "군사정권은 물러나라"라고 외치고 있었다. 1983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앞두고 일주일 전부터 학생들은 거리로 나섰는데, 안 씨 기억으로는 1980년 5월 이후 최대 규모의 학생 시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예술대학 부근에서 포위돼 광주 서부경찰서로 끌려갔다.

안 씨는 "도망치다 예술대 건물로 들어갔는데, 사복경찰들이 출입문을 막고 학생들 하나하나 검문을 했다. 이미 지명수배돼 얼굴이 알려진 상태라 너무 허무하게 금방 잡혔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됐다. 육체적 고문과 정신적 고문이 동시에 행해졌다. 경찰서 지하실에서 묶인채로 밤낮으로 쏘아대는 야구장 조명탑 때문에 며칠간 한숨의 잠도 자지 못했다. 지칠대로 지칠때 쯤 이번엔 어깻죽지를 늘리고 얼굴을 모서리에 박아 고통을 줬다.

안 씨의 그때의 고문 후유증을 지금까지도 안고 산다.

"시위 주도한 사람들 이름 대."

경찰의 질문은 간단했지만, 안 씨는 답하지 않았다. 폭행과 고문이 이어졌고 결국 군대에 끌려갔다. 31사단 훈련소를 거쳐 전라도와 전혀 관계없는 경기도 5사단. 최전방으로 배치받았다.

광주에서 데모하다 잡혀 왔다는 사실은 선임들에게 미움받기 딱 좋은 이유였다.

그는 "고참들이 너 같은 광주놈들, 데모하다 온 놈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고 때리고 욕하고… "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처구니 없는 일들도 수시로 일어났다. 복무하던 중 종종 골방에 가둬 놓고 강제징집 당하기 전까지 무슨 책을 읽었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이 지시에는 조건이 있는데, 작성을 위해 지급한 모나미 볼펜의 잉크를 다 쓰라고 했다. 다 못 쓰면 맞아야 했다.

또 '김대중은 왜 빨갱이인지 설명하는 책'을 주고 독후감을 쓰게 하면서 전두환을 찬양하도록 했다.

휴가를 나와도 맘이 편하지 않았다. 혹시 대학에 갔다가 나를 만났다는 이유로 동료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까, 학생운동 계획을 알게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 날들을 보냈다.

안 씨 뿐만 아니라 강제징집 대상자 중에 이런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의문사하고 탈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 씨 역시 "최전방에서 겨울에 눈이 쌓이면 지뢰도 안 터지니, 나도 고통스러운 맘에 그냥 저쪽으로 넘어갈까 하는 안 좋은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버티고 버텨서 안 씨는 1986년 3월 제대했다. 2학년 2학기가 등록된 상태에서 군대로 끌려갔으니, 2학기를 다시 등록하고 등록금도 다시 내야 했다.

제대 이후에도 한국은 여전히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 안 씨는 다시 1987년 6월 항쟁을 광주에서 주도하다, 서구 쌍촌동에 남아있는 옛 505보안부대나 안기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 전신)에 끌려가 또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의 청춘은 그렇게 정부의 폭력에 의해서 얼룩진 채로 저물어갔다.

안 씨는 당시 많은 대학생들이 잡혀 간 것은 전두환 정권에 부역했던 학교 관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국가가 대규모 인원의 청년들을 강제징집했는데, 대학 관계자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학생들을 보호해야 하는 학교가 학생들 이름을 팔아 군대를 보내고 교도소를 보낸 것이다. 당시 협조했던 조교, 교수 등 대학 관계자들과 녹화사업을 주도했던 장교들까지, 가해자들은 아직도 살아있다"며 "전두환 정권은 '국방의 의무'를 정권 보호를 위해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악용했다"고 말했다.

안 씨는 "몇 년 전 서울대는 강제징집에 협조했다는 것에 총장이 공식 사과를 했다. 5·18민주화운동 진원지인 전남대도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야 할 때"라고 거듭 강조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도 버텨냈던 청년 안원균은 어느새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중년이 됐다. 그리고 9명의 직원 월급 밀리지 않는 것이 최대 관심사가 된 평범한 자영업자가 지금 그의 삶이다.

허나 평범한 삶을 되찾았다고 해서 안 씨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보상받거나, 트라우마 치유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다.

"데모한 게 뭐 자랑이라고…. 그걸 신청하고 있어. 그냥 사는거지"하고 말하는 안 씨.

그런 그도 피해자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인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활동만큼은 열심이다.

안 씨는 "1년 전 위원회가 발족했지만, 여전히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피해자들이 많다. 가족들에게도 고통스러운 당시의 일을 꺼내지 않는다"며 더 많은 피해자들이 세상에 드러날 때까지 전두환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낼 것이라 말했다.

한편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 당시 정상적인 입대절차를 무시당한 채 하루아침에 군대로 끌려간 강제징집 피해자 1152명으로 파악된다.

녹화사업 피해자는 공식적인 기록으로 1192명에 이르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된 종료 시기 이후에도 '선도공작'이라는 이름으로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같은 형태의 공작이 다시 되풀이된 것으로 파악된다. 피해자들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프락치로 활용 당했다는 죄책감, 모멸감 등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다.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