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창·하정호> 다른 30년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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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창·하정호> 다른 30년도 가능하다
하정호 광산구청 교육협력관
  • 입력 : 2021. 04.11(일) 14:31
  • 편집에디터
하정호 광산구청 교육협력관
영화 '자산어보'를 보았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정약종은 죽임을 당하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길에 오르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정약용은 강진에 머물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현실과 동떨어진 성리학을 비판하며 원시유학으로 되돌아가 왕도정치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약전이 쓴 책은, 홍어 장수 문순득이 풍랑을 만나 바다를 떠돈 이야기인 '표해시말'과 어부 장창대와 함께 쓴 '자산어보', 그리고 소나무 정책의 폐단을 밝힌 '송정사의' 정도뿐이다. 경전의 시비를 가리는 것보다 사물의 이치를 따져 민생을 보살피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영화에서 제자인 창대가 스승에게 묻는다. "선상님, 선상님께 어보는 뭡니까?" "내가 바라는 것은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그런 세상이다." 하지만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바랐던 창대에게 서학쟁이 스승의 그런 태도는 몹시도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스승이 제자에게 묻는다. "공부해서 출세하고 싶지?" "임금 품에 들어야 백성을 위할 수 있응께요." "너 같은 놈 때문에 니가 말한 성리학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거야, 이 놈아."

정약전 형제가 유배를 당한 지 이백년이 지났지만 임금 품에 들어야 백성을 위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민정수석과 최서원 등 측근의 국정농단으로 "이게 나라냐"는 비판을 받으며 탄핵을 당한 지 4년 만에 재보궐선거를 치렀다. 서울과 부산의 41개 선거구에서 단 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 집권여당의 참패를 두고서 이 또한 '탄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LH사태에 이어 '믿는 도끼'였던 김상조 정책실장과 박주민 의원의 '내로남불'은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기대는 번번이 낙담으로 바뀌지만 그래도 제왕적 대통령제가 유지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여전히 각박하고 그만큼 변화를 바라는 욕망이 크기 때문이다. 국정농단 세력만큼이나 개혁을 바라는 사람에게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권력은 매력 있다. 절대반지를 얻으면 세상도 그만큼 빨리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자신을 역사발전의 도구로 쓰라고 했고, 이재명 경기지사 또한 자신이 도구로 쓰이는 정치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백성을 위한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우선 임금 품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생각이 사람들을 무리 짓게 만들고, 그 무리는 인의 장막을 쳐 자신들을 거쳐야만 임금을 알현할 수 있게 한다. 이로써 능력 있는 사람이 등용되지 못하고 비판의식은 흐려지며, 자기 무리의 잘못에는 둔감하게 되고 만다.

지금과 같은 대통령 중심의 양당정치는 87년 체제의 산물이다. 군부독재에 맞서 사회질서를 새롭게 바로잡고자 했던 사람들도 대통령 중심의 절대권력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사회 곳곳에 뿌리박힌 구체제를 일거에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87년 민주화 대투쟁 이후 '민족 민주 인간화교육'을 내세우며 전교조를 조직한 지 30년이 지났다. 전교조 교사들의 해고에 반대하며 항의시위에 나섰던 고등학생들이 91년에는 대학생이 되어 민자당 해체와 노태우 타도를 외치며 분신했다. 91년은 지방자치가 부활한 해이기도 했으니, 교육자치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올해 열린다고 한다. 그 30년 동안 우리 교육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자산불평등과 빈부격차는 어느 때보다 크고, 인재가 서울로 몰려드는 탓에 지방대학은 소멸위기에 처했다. 30년 전에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외쳤지만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여전하다.

우리의 교육은 정치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단체장과 의원들이 줄을 서야 하는 정치문화가 여전하다면, 결선투표나 정당명부 비례대표가 도입되지 않아 정당의 다양성조차 보장되지 않는다면, 공부는 여전히 출세의 수단이 되고 학벌은 정치 패거리의 온상이 될 것이다. 그런 놈들 때문에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다고 비판하기는 쉽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정말 그럴까?

지금 시민들이 요구하는 정치는 적폐청산이나 진보와 보수의 갈라치기가 아니다. '현실정치'를 이유로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어가는 것도 안 된다. 교육은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불어넣어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이다. 영화 '자산어보'는 양반이 된 창대가 가렴주구에 환멸을 느껴 흑산도로 되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이라는 섬 이름이 컴컴하고 두려워 정약전의 가족들이 바꿔 부른 이름이다. 자(玆) 역시 검다는 뜻이지만, 그윽하여 오묘한 이치를 숨기고 있을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이치가 자산에 숨어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다른 30년도 가능하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