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적 SF가 던지는 인간성과 그 고유함에 대한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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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적 SF가 던지는 인간성과 그 고유함에 대한 질문들
  • 입력 : 2021. 04.08(목) 15:55
  • 박상지 기자

지난 2018년 '4차 산업혁명, 로봇 소피아에게 묻다' AI 로봇 소피아 초청 컨퍼런스에서 소피아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시스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 민음사 | 1만7000원

지난 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명실상부 현대 영문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로 꼽힌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상 수상 이후 최초로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신작 '클라라와 태양'이다. 지난 3월 영국에서 가장 먼저 출간된 이 책은 현재 30개국에 판권이 팔려 미국·캐나다·호주·일본 등에서 연달아 출간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민음사를 통해 출간됐다. '클라라와 태양'은 인공지능 로봇과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았다.

소설의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멀지 않은 미래의 미국. AI 제조기술과 유전공학이 발전하고, 사회는 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계급 시스템을 재구성한다. 아이들의 지능은 유전적으로 '향상'되고, 학교에 갈 필요 없이 집에서 원격 교육을 받는다. AF(Artificial Friend)라 불리는 인공지능 로봇이 이런 아이들의 친구로 생산돼 팔린다. 물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 혜택을 누리는 건 아니다. 재력이나 계급이 그에 미치지 못하거나, 혹은 시스템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따로 공동체를 꾸려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과학기술의 혜택에서 제외돼 있다.

작품이 발표되고 난 뒤, 서구의 유수 언론 매체들은 인공지능 로봇이라는 타자(他者)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나를 보내지 마'와 '파묻힌 거인'과 한데 묶어 3부작으로 부르기도 한다. 다섯 살 때 영국으로 이주하여 평생을 살아온 작가는 '이방인' 혹은 '타자'가 된다는 점에 깊이 천착해 왔고, 현재까지 발표된 그의 작품에는 이처럼 양면적이고 위태로운 타자의 시선을 통해 당연한 듯 존재해온 세상의 근간을 뒤흔드는 조용한 질문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은 동화를 한번 써보고 싶다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생각에서 탄생했다. 움직이고 말할 수 있는 장난감이 자신을 데려갈 어린 소녀를 기다리는 이야기를 떠올린 이시구로는 자신의 딸인 나오미 이시구로에게 이야기의 얼개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평상시 아버지 소설의 편집자 역할을 해 온 딸의 대답은 객관적이고 단호했다. 어린이에게 들려주었다가는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딸의 조언에 따라 이시구로는 이 이야기를 동화책이 아닌,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장편소설로 집필하기 시작해 팬데믹이 세상을 뒤덮기 시작한 시점에 마쳤다. 완성된 소설 '클라라와 태양'은 원 모티프의 형상을 그대로 간직한 우화적 SF다. 이야기는 간결하고, 늘 그랬듯이 잔잔한 지문과 대사 사이에 깊은 행간이 있으며, 그 '사이'를 읽어내다 보면 가슴 깊이 파고드는 슬픔과 여운이 찾아온다. 세상에서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두 연약한 존재가 우연히 만나는 그 순간부터 아픔은 예약돼 있고, 읽는 이들은 그 슬픈 예감이 운명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 이끌려 마지막 페이지까지 차마 눈을 뗄 수 없다. 이는 우화의 힘이자, 그 강력한 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거장의 솜씨다.

인간이 아닌 존재인 클라라의 인간에 대한 한결 같은 헌신이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과연 '인간됨'이란 무엇인지, 무엇이 인간 개개인을 고유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고찰하고 생각하게 된다. 전 세계가 질병과 차별과 갈등으로 고통 받는 시기, 이제 그 질문과 마주할 때가 됐다.

박상지 기자 sangji.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