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남 양산초 교감 |
시쳇말로 민심의 결과가 극단적이고, 오기 스럽다. 문제해결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나, 적폐의 뿌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우리 사회 일반의 합리적 선택, 이런 것은 개나 줘버리라고 한다. 한마디로 회초리에는 감정이 없고, 사랑의 매 자체에는 사랑이 없다는 의미다. 민심은 그렇게 가혹한 것 같다. 매번 선거 때 마다 느끼지만, 제법 똑똑하고, 참신하고, 미래지향적인 건강한 인물 하나 살려둘 만도 한데, 모든 선거의 결과는 늘 가혹하고, 한치의 에누리도 없었던 것 같다. 왜 그럴까? 인물론이 당파성보다 앞설 수 없고, 정책이 진영논리를 넘어설 수 없음을 또 확인하는 순간이다.
언젠가 일군의 학부모님들이 학교에 '사랑의 매' 전달하기 운동을 한 적이 있다. 진짜로 학생들을 매로 다스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학교에서 엄하게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에 대해 학부모로서 감싸고 돌지만은 않겠다는 취지였고,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신뢰의 표시이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그 사랑의 매에 구멍을 뚫어 철끈으로 묶어서 교실 앞에 걸어두고, 결정적인 순간에 선생님이 한 번씩 이 회초리를 들어 보이며, 엄포를 놓기도 했다. 어느 순간 그 사랑의 매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안팎의 우려가 있었다. 사랑의 매 자체에는 사랑이 없다는 생각이다. 때리는 사람은 아무리 사랑을 가지고 사용하지만, 맞는 사람의 고통은 너무나 아프고, 가혹하고, 당혹스러워서, 그 사랑을 느낄 수가 없다. 오히려 폭력을 내 성화하고 정당화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회초리에는 감정이 없고, 사랑의 매 자체에는 사랑이 없다는 것은 민심이 가진 냉혹함을 말해주는 것 같다.
칸트라는 유명한 철학자는 이러한 판단을 '주관적 보편성'이라고 칭하고, 각자의 판단은 거침없는 주관성을 나타내지만, 그것이 하나로 소통되고 나면 비로소 엄청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질적 인식의 특성을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무관심한 듯하지만, 늘 귀납적으로 몰아치는 인생사의 가혹함으로 해석 한다.
'사랑의 매' 자체에는 사랑이 없지만, 온전히 그 매의 고통을 느끼며, 사랑을 느껴야 하는 몫은 누구의 것일까? 아니 매를 든 이는 사랑 없이 매를 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 매 속에서 사랑의 흔적을 찾는 이들이 있다. 새디스트의 천형을 타고 난, 그 이름 정치인이다. 그런 정치인이 많았으면 좋겠다. 거대한 파도와 같은 진영논리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믿고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정치인, 그런 정치인들이 민심의 냉혹함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감정 없는 회초리 대신,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나누고 싶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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