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의 또 다른 거대한 폭력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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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전두환 정권의 또 다른 거대한 폭력을 아시나요
•5‧18 41주년 특집 ‘80년 오월 그 후’ - (Ⅰ) 녹화사업이라고 부르던 지옥 ⓪ 프롤로그||운동권 정신개조 이유로 강제징집||휴학시키고 고문하고 군대 보내||의문사 엄청났지만 밝혀진 건 없어
  • 입력 : 2021. 04.06(화) 16:59
  • 노병하 기자

당시 보안사가 강제징집한 청년들을 기록한 '특수학변자보호카드'.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 토론 자료집 발췌.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은 18일부터 27일까지의 기록이다. 이 기간동안 전두환 등 신군부 쿠데타세력은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고,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허나 비극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추악한 폭력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해 9월부터 녹화사업(綠化事業)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지옥이 열린 것이다.

녹화사업은 민둥산 등에 나무를 심어 푸른 산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신군부 시대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제5공화국 정권 치하에서 대학생들의 머리의 붉은 물(운동권)을 푸른 물로 만든다는 의미였다.

1980년 9월 4일, 신구부는 계엄포고령 위반자 64명을 집단 입영 시켰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이듬해 1월 12일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을 발표하면서 강제징집은 법제화 됐다. 대상자도 폭 넓었다. 이 시기 남자 대학생이었다면 누구나 이 사업의 대상자가 될 수 있었다. 전직 보건복지부장관이면서 현직 작가인 유시민 또한 이 사업의 해당자였다. 특히 광주·전남출신 대학생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강제징집자 학교별·연도별 징집현황'에 따르면, 1980년 9월부터 1984년까지 강제징집 피해자는 1152명, 광주·전남에서는 40여명이 이유도 모른채 고문을 당하고 군대로 끌려갔다. 더욱이 이 수치도 명확한 것은 아니다.

당시 녹화사업 대상자로 지정되면 일단 강제휴학이 이뤄졌다. 수사관들이 지도교수들을 찾아와서 반강제로 대상 학생을 휴학시킬수 있었다. 영장도 마음대로 뽑아왔다. 신체검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녹화사업 대상자는 그저 끌려갈수 밖에 없었다.

끌려간 이들은 대학 내 학생운동을 감시하고 방해하는 프락치가 될 것을 강요받았고, 이 과정에서 당연히 온갖 폭력이 동반되었다. 이런 고문을 견디다 못한 학생들이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 시기에 발생한 수많은 군 의문사 사건 중에는 녹화사업 대상자들도 상당수 포함됐다.

광주‧전남에서 끌려간 젊은이들의 경우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상을 초월한 탄압과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보안사가 강제징집 청년들을 대상으로 지시한 진술자서전.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 토론 자료집 발췌.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기계음과 쏟아지는 조명탄 불빛 때문에 며칠 밤을 새웠다", "진술이 맘에 들지 않을 때마다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물고문, 전기고문에 숨도 쉬기 어려웠다" 등 참혹한 이야기가 당연하게 흘러나왔다.

군대 내에서도 차별을 받아야 했다. 시위에 가담한 것에 대한 반성문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간첩이라 말하는 관련 서적을 읽고 독후감을 쓰게 했다. 제대로 응하지 않으면 역시 폭력이 뒤따랐다.

조종주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사무처장은 "어쩌면 이 녹화사업이야 말로 신군부가 자행한 또 다른 학살이자 오월 탄압의 연장선이었다"면서 "이 사업의 실제 희생자에 대해 알려진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누구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결과라고 볼수 없다. 올해부터라도 꼭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노병하 기자 bhn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