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라의 현대미술 산책 17) 다다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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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획
조사라의 현대미술 산책 17) 다다이즘
조촐한 사교장에서 펼쳐진 기상천외한 이벤트…현대미술사 한 획 ||취리히, 베를린, 하노버 등 동시다발적 발생…무의미함의 의미 ||마르셀 뒤샹 등 주축…레디메이드·포토몽타주 등 개발
  • 입력 : 2020. 12.13(일) 13:47
  • 편집에디터

다다그룹 (1921). 만 레이 홈페이지 제공

1차 세계대전의 깊어가는 포화 속에서 중립국인 스위스 취리히에 망명자들이 모여든다. 1916년 2월 시인이자 극작가 휴고 발(Hugo Ball)이 사교장 '카바레 볼테르'를 연다. 50여 명 정도 수용 가능한 조촐한 이곳에서 한스 아르프(Hans Arp), 트리스탕 차라(Tristan Tzara), 마르셀 장코(Marcel Janco) 등 예술가들이 기상천외하고 도발적인 퍼포먼스와 시낭송을 펼친다. 7년 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다다이즘 탄생의 순간이다.

다다(Dada)라는 용어는 프랑스의 어린이용 장난감 목마를 일컫는다. 사전을 펼치고 그 위에 나이프를 꽂아 우연히 정한 용어란다. 작명 또한 다다이즘의 본질인 무의미함을 실천한 셈이다. 다다이즘은 합리적·진보적인 가치관을 중요시하는 서양 세계에 대한 반격과 제동이었다. 20세기 초 문명의 이기를 누리던 열강들은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100여 년 전 상황이 현재와 겹치는 것은 왜일까? 성장 지향적인 사고 체계가 전쟁을 일으켰듯이 환경과 보존 보다는 개발, 이윤 추구의 목표를 향해 뛰었던 인류 사회에 마치 전쟁과도 같은 팬데믹이 야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취리히를 시작으로 다다이즘은 베를린, 하노버, 퀼른, 뉴욕, 파리 등 세계 각국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1918년 트리스탕 차라가 '다다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전위적인 현대미술사의 한 지점을 차지하게 된다. 이들은 미술로 인정할 수 없는 도전들을 수행해나갔다. 이성보다는 비이성을 과학적인 결과보다는 우연적 요소를 강조했다. 문명의 허구성에 반발해 기성 체제를 부정하고 파괴하면서 인간의 또 다른 돌파구를 찾으려했던 것이다.

뉴욕 다다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프란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 만 레이(Man Ray) 등이 전개해나간다. 프랑스 출신 뒤샹은 전쟁을 피해 1915년 뉴욕으로 건너간다. 그는 일찍이 아모리쇼에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를 출품해 명성을 쌓고 있었던 터다. 뒤샹은 1917년 대량생산된 남성용 소변기에 'R. MUTT'라고 서명한 레디메이드 작품'샘'으로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유도하면서 현대미술의 선구자가 된다.

만 레이(Man Ray)도 미술이라고 규정했던 고정관념들을 해체하고 나섰다. 다리미 표면에 구리 못 14개를 부착한 '선물'은 쓸모 있는 물건인 다리미에 못을 박으면서 쓸모없는 것으로 반전을 꾀한 것이다.

다른 도시에 비해 정치적인 성향이 강했던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은 합성 포토몽타주를 개발하면서 사진의 생생한 물성을 사회 비판 도구로 활용했다.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의 사진과 스케치가 결합된 포토몽타주 '미술비평가'는 전쟁으로 인한 비이성적인 모습이 담겼다. 붓으로 그린 것보다 더 생생하게 악랄한 표정과 작태가 두드러진다. 그의 아상블라주 대표작으로 미용사들이 사용하는 두상에 자와 놋쇠 나사 등 하찮은 부속품을 붙인'기계적 두상(우리 시대의 정신)'은 불완전한 인간의 자화상이니라.

이외에 하노버에서는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 등이 활동했는데 길거리의 잡동사니로 만든 건축물 '메르츠 바우'는 충동적으로 선택된 오브제 미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폐품을 예술로 승화시킨 슈비터스는 '정크아트'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전통과 질서에 저항하면서 스스로마저 부정해 소멸되었던 다다의 미학은 20세기 후반기 팝아트, 미니멀 아트, 키네틱 아트 등의 원천이 되었다.

"나는 이 선언문을 쓴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나는 선언문들에 반대한다. 그 때문에 나는 원칙들에 반대한다."

차라가 주창한 모순적인 언어들의 잔치인 선언문은 시대상의 반영일 것이다. 100여 년 전 인류에게 광풍처럼 전쟁이 휘몰아쳤고 위태로운 나날 속에서 예술은 지진계처럼 방향과 역할을 찾아 헤맸다. 당시 휴고 발의 제례의식 같은 회의주의적인 퍼포먼스는 불안과 분노로 잠식되어가는 동시대 우리의 몸짓과도 닮았다. 2020년 유례없이 혹독한 시절을 견뎌낸 예술은 또 어떤 서사를 창조하게 될까? 혼란의 시대 예술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예술의 시선은 지금쯤 어디를 향해 있는 걸까? 앞으로 도래할 예술의 행로가 궁금해진다.

마르셀 뒤샹. 만 레이 홈페이지 제공

만 레이 작 '선물' (1921) 테이트 모던 갤러리 제공

라울 하우스만 작 '미술 비평가'(1919-1920) 테이트 모던 갤러리 제공

라울 하우스만 작, '기계적 두상(우리 시대의 정신)' (1920년대) 퐁피두센터 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