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인당수와 임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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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인당수와 임수도
  • 입력 : 2020. 08.19(수) 13:47
  • 편집에디터

풀어 쓴 심청전 책 표지 중 하나

심청이 빠져 죽은 인당수

"한 곳을 당도하니 이는 곧 인당수라. 대천바다 한 가운데 바람 불어 물결 쳐, 안개 뒤섞여 젖어진 날, 갈 길은 천리만리나 남고, 사면이 검어 어둑 정그러져 천지적막한데, 까치뉘 떠들어와 뱃전머리 탕탕, 물결은 와그르르 출렁 출렁 도사공 영좌(領坐)이하 황황급급(遑遑急急)하여 고사지제를 차릴제, 섬 쌀로 밥 짓고 온 소 잡고 동우술 오색탕수 삼색실과를 방위차려 갈라 궤고 산돗 잡아 큰칼 꽂아 기는 듯이 바쳐놓고 도사공 거동 봐라 의관을 정제하고 북채를 양손에 쥐고 북을 두리둥 두리둥 둥 둥~(하략)"

판소리 심청가 중,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이다. 엇모리장단으로 긴박하게 노래하다가 느린 자진모리로 한자성어 투의 긴 사설을 읊어낸다. 급기야 휘모리장단으로 물에 빠지는데, 북소리를 뒤로 하며 마지막 사설이 이어진다. "심청이 거동 봐라 샛별 같은 눈을 감고 치맛자락 무릅쓰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뱃전으로 우루루루 만경창파 갈매기 격으로 떴다 물에가 풍~"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을 포함하여 인당수 빠지는 대목이 심청가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이랄 수 있다. 큰 소 잡고 술항아리 가득 맑은 술 담그고 오방색으로 구비된 탕을 끓여내며 삼색의 과일들을 차려놓은 풍경을 자세하게 그려낸다. 산 돼지를 잡아 큰 칼을 꼽아놓으니 돼지가 기어가는 듯하다. 무속의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도사공(都沙工)은 우두머리 선장이다. 제사 복식을 갖추고 북채를 들었다. 큰 북을 울리며 지내는 제사였던 모양이다. 제사 풍경도 그러하려니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도대체 인당수가 어딜까 하는 것이다. 전제가 되는 것은 심청전이라는 고소설, 심청가라는 판소리다. 백령도를 비롯하여 전남 곡성, 충남 예산, 전북 부안 등 심청의 고장이라고 주장하는 곳들이 많다. 단적으로 말하면 설화를 이야기나 소설로 보지 않고 역사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해프닝들이다. 이야기의 지극한 은유를 애써 외면하는 발상이라고나 할까. 소설 심청전은 연대나 작가 미상일뿐더러 주요 줄거리는 거타지 설화와 작제건 설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관련하여 장성의 홍길동과 곡성의 심청을 주제로 한 졸고 '설화기반 축제 캐릭터의 스토리텔링과 노스탤지어 담론(남도민속연구, 2007)'이 있으니 참고 가능하다. 소설이나 판소리에서 묘사하는 인당수(印塘水)의 본래적 의미는 깊은 물이다.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배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알려진 장소다. 전국 여러 지역의 제방 축조 설화에서도 유사한 구성들을 볼 수 있다. 인신공희(人身供犧)로 주로 처녀가 언급되는 것은 생식(生殖)과 관련된 고대로부터의 관념에서 비롯된다.

거타지(居陀知)와 작제건(作帝建)의 항해

<삼국유사>권2 기이편의 내용이다. 진성여왕 막내아들 아찬 양패(良貝)가 당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었던 모양이다. 함께 가는 무리 중 거타지라는 인물이 궁사로 뽑혀 따라가게 되었다. 도중에 곡도(鵠島)라는 섬 인근에서 풍랑을 만난다. 양패가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다. "섬 안에 신령한 연못이 있다. 여기에 제사를 지내야 풍랑이 멎는다"는 점괘가 나왔다. 그 못에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지냈더니 못물이 높이 치솟는 게 아닌가. 그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활을 잘 쏘는 사람 하나만 이 섬에 놔두고 가면 순풍을 얻을 것이다"고 했다. 섬에 남겨둘 자를 고르기 위해 제비를 뽑기로 했다. 각자의 이름을 적은 50쪽의 목간(木簡, 종이가 나오기 전 글을 쓰던 나무막대기)을 물에 넣었더니 거타지라고 쓴 목간만 물에 잠겼다. 모두 당나라로 떠나고 거타지만 섬에 홀로 남았다.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홀연히 나와 말했다. "나는 서해의 신(西海若)이다. 매일 해 뜰 때마다 하늘에서 한 중이 내려와 진언(眞言)을 외며 못을 세 바퀴 돌기만 하면 가족들이 모두 물 위에 뜨게 되고 그 때마다 그 중이 자손들의 간을 하나씩 빼어먹었다. 지금은 아내와 딸만 남게 되었다. 내일 아침에 그 중이 나타나면 활로 쏴 달라." 이튿날 아침 중이 간을 빼먹으려고 내려왔다. 거타지가 활을 쏘았더니 여우가 떨어져 죽었다. 노인이 보답으로 자기 딸을 아내로 삼아 달라 했다. 딸을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 품속에 넣어주었다. 또한 두 마리 용에게 명하여 앞서간 사신 일행들에게 데려다주었다. 신라의 배를 두 마리 용이 받들고 있는 것을 보고 당나라에서 성대히 대접을 하였다. 고국 신라에 돌아와 행복하게 잘 살았다.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라는 작제건 설화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항해 도중 풍랑이 사나워져 점을 쳤다. 고려 사람이 배에서 내려야 한다는 점괘가 나온다. 작제건이 섬에 내렸다. 홀연히 서해용왕이 나타나 부처의 모습을 한 자를 퇴치해달라고 요청한다. 작제건이 활로 쏘았는데 부처는 늙은 여우였다. 이후 용왕의 딸과 결혼하여 잘 살았다. 꽃으로 변하여 거타지 가슴 속에 들어가는 처녀나 작제건의 아내가 되는 용녀 모두 심청이 인신공희물이 되었다가 연꽃 속에서 환생하여 황후가 되는 스토리와 닮아있다. 괴물 퇴치의 맥락도 있지만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서해의 물길이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오고갔을 물길 중 가장 파도가 험한 장소 혹은 풍랑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심청전으로 확대된 이 이야기의 모티프를 어느 한 곳을 특정하여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장강(양쯔강) 이북 서해(황해)의 어딘가 물길을 사례 삼고 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유사한 이야기들이 설화로만 남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화랑세기나 고려도경을 통해서도 맥락을 추적해볼 수 있다.

전북 위도에서 인양된 문인석, 임수도가 인당수일까?

1984년 경, 위도 진리 서봉신이 임수도 근처에서 돌 하나를 건져 올렸다. 묘지 앞에 세우는 문인석 형태다. 돌의 재질이 우리나라에서 흔한 것이 아니었다. 땅에 세울만한 구조로 만든 것도 아니다. 뱃사람들이 '대신맥이'로 사람과 같은 모양의 문인석을 바다에 헌신(獻身)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1990년대 중반 위도 치도리에서 해안 일주도로를 내던 중 갯벌 속에 있는 석인상 5구를 또 발견한다. 120cm 정도 크기의 사람 모양 문인석으로 판명되었다. 재질이 일반적인 화강암이나 현무암이 아닌 백석(차돌)이었다. 이를 두고 국내에는 없는 돌이며 중국 양쯔강 하류에서 생산되는 돌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고려시대 원나라 사신들이 양쯔강 하구에서 흑산도를 거쳐 중간 기착지인 위도에서 개경으로 항해할 때 무사안녕을 비는 뜻에서 당시 해변에 묻었던 것이라고 했다. 이들 두고 중앙대 송화섭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과 마을 주민들은 중국배가 위도 임수도 혹은 위도 해안에서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공희의례의 하나로 문인석을 헌신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거나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위도뿐만 아니라 제주도, 광양, 영광 등지에서도 불교와 토속신앙이 결합된 석상들이 출토된다. 무사항해를 염원하는 제의의 하나로 해석한다. 어쨌든 대중국 물길과 관련하여 위도와 임수도의 지정학적 위상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향후 전문가들에 의한 정밀한 분석과 연구가 뒤따라야겠지만, 우선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거친 파도에 대한 대응방식의 하나가 제사이고 살아있는 돼지, 짚으로 엮어 만든 띠배나 남근을 강조한 허수아비(제웅), 사람 모양의 석조각이나 문인석 따위가 희생물 혹은 헌식(獻食)이라는 점이다. 지금도 용왕제나 풍어제 등의 무속의례에서는 돼지를 산 채로 바다에 헌식한다. 서남해 전 지역에서 연행되던 띠배형식의 헌식제의는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위도 띠뱃놀이가 대표적이다. 물론 이외에도 진도 조도 맹골도 해역, 충남 태안 마도 해역, 황해 장산곶 혹은 인천 백령도 해역 등 두루두루 거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수도를 인당수라 하는 전북 부안이나 위도 사람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해역이 갖는 지정학적 조건 때문일 것이다. 실제 1993년 292명의 사망자를 낸 서해훼리호 사건을 비롯해 임수도 주변에서 크고 작은 해상사고가 일어났다. 우연의 일치일까 필연일까 인당수와 이름조차 비슷한 위도의 임수도 돛단여 한 가운데는 마치 남근처럼 우뚝 솟은 바위가 있다. 풍선배의 돛 모양이기에 돛단여라고 했을 것이다. 한 때는 부안 해안지역 사람들이 마을제의처럼 정기적으로 제의를 지내던 공간이기도 하다. 설화적 공간을 특정하는 것이 무슨 큰 의미를 지니랴. 또한 처한 입장과 처지에 따라 해석이 다를 테지만 나는 매번 이 해역을 지날 때마다 심청의 인당수와 홍길동의 율도국을 상상한다. 위험한 물길이라서가 아니라 심청의 재생과 이 땅의 유토피아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남도인문학팁

<화랑세기>와 <고려도경>에 나타난 공희(供犧)물

서종원은 그의 글 「위도 띠뱃놀이에 등장하는 띠배의 역사성과 본연의 기능에 관한 고찰」(무형유산 제8호, 2020)에서 괄목할 만한 정보를 추적한 바 있다. 띠배를 띄워 보내는 것과 인당수의 인신공희를 역사적 자료를 통해 분석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는 항해자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적지 않다. 항해 도중에 특정 해역에 도착하면 신앙물(의례 도구)을 바다에 빠뜨리거나, 무사 항해를 위해 암초 등에 불상을 올려놓고 간략하게 경을 읽었다는 내용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다. 유독 물살이 센 곳이나 해상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 지점에 도착하면 항해자들은 특별한 의례를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화랑세기(花郞世記)』와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그때 풍랑을 만났는데 뱃사람이 여자를 바다에 빠뜨리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공이 막으며 "인명은 지극히 중한 데 어찌 함부로 죽이겠는가?"하였다. 그때 양도 또한 선화로서 같이 배를 타고 있었는데 다투어 말하기를 "형은 여자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주공을 중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만약 위험하면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였다. 공이 침착하게 말하기를 "위험하면 함께 위험하고 안전하면 함께 안전하여야 한다. 어찌 사람을 죽여 삶을 꾀하겠는가?"하였다. 말을 마치자 바람이 고요하여졌다. 사람들은 해신이 공의 말을 듣고 노여움을 풀었다고 생각하였다>. <신시 후에 합굴에 당도하여 정박하였다. 그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고 주민도 역시 많았다. 산등성이에 용사(龍祠)가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고 가고 할 때 반드시 제사를 드리는데 바닷물이 이곳에 이른다>

순조로운 항해를 희구하는 뜻으로 어전(御前)에서 내린 풍사용왕첩(風師龍王捷)과 지풍위(止風位) 등이 적힌 부적 13부(符)를 바다에 던졌다는 내용도 곁들여진다. 여기서의 위(位)를 위패나 나무 조각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 기록과 설화들을 견주어 살펴보면 인당수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을 엿볼 수 있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거타지와 작제건 설화를 비롯한 심청전의 인당수 이야기가 포획하고 있는 동아지중해로서의 물길과 거센 파도, 그 안에 담은 희망과 소망의 투사다. 고대로부터의 연안항로와 사단항로 중 유독 물길이 험한 곳들이 있었고 이 장소를 매개 삼은 사고체계나 대응방안들이 실제 의례는 물론 문화적으로 재해석되어 각종 모티프로 기능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춤극으로 재해석한 심청 포스터-전남도립국악단 제공 복사

돛단여(왼쪽)과 임수도(오른쪽)-뒤쪽이 위도다-이윤선 촬영

부안 위도 임수도 전경-이윤선 촬영

북쪽 항로에서 바라본 위도 임수도 돛단여-이윤선 촬영

위도 서쪽에서 바라본 밭(바깥)바다 연안항로-이윤선 촬영

위도 임수도 인근에서 인양된 문인석-변남주 촬영

위도 치도리앞 개펄에서 발굴된 문인석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