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다시 행간을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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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다시 행간을 읽으며
  • 입력 : 2020. 06.10(수) 14:29
  • 편집에디터

영산강 일출. 뉴시스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도종환 시 <여백>이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아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고백이다. 풍경이 그렇고 물상이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그래서일 것이다. '스스로 그러한 것'을 자연(自然)이라 한다.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 여백은 이러한 '스스로 그러한 것'에서 발현된다. 하지만 허공이 비어있음이 아니듯이 공허가 아니다. 그려지지 아니한 아니 차마 그리지 못하거나 못 다 그린 이야기들이 빼곡하다.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넣고 빼지 않았을 뿐이다. 도종환의 시에서는 이를 넉넉한 허공과 균형에 비유했다. 여백을 중시하는 것이 어디 시뿐이랴. 특히 수묵화에서 강조하는 것이 여백이다. 그려진 부분보다 그려지지 아니한 부분에 주목하는 시선, 이것이 노장 사상을 비롯한 동양철학의 중요한 배경이라는 점 모르는 사람 없다. 고대로부터 장구한 세월동안 축적되어 온 시(詩) 또한 그 토대다. 시의 어원이 된 <시경>의 리듬과 고저장단을 보라. 다 말하지 않고 모두 노래하지 않으며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전하는 바들이 융숭하다. 선율과 선율, 장단과 장단 사이에 미분(未分)의 행간과 격절(隔絶)의 대칭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춤은 어떤가. 경박하게 흔들어대지 않으며 욕망을 위해 솟구치지도 않고 그저 땅을 향해 다소곳이 가라앉히는 몸짓을 귄있다고 평하는 남도의 미학 말이다. 몸짓과 호흡, 나가고 들어서는 들숨 날숨의 정중동, 그 안에는 수많은 비어있음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안에 깊숙이 침윤된 마음의 정처, 이를 표현하기 위한 문학적, 예술적 장치들을 거론하기에는 이 지상에 준비된 말들이 오히려 부족할 뿐이다.

여백에서 행간까지

여백으로 시작하는 화두, 감회가 새롭다. 본지에 칼럼을 쓰기 시작한지 이백 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주도 빠트리지 않고 때로는 연시 특집칼럼 등을 덧붙이며 5년을 소요했으니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기간이다. 염려하는 것은 정제되지 않은 내 언설과 다듬어지지 않은 노래들이 귀한 지면을 간단없이 낭비하고 만 것은 아닌지. 정보의 홍수에 휘말려 흙탕물 속에 파묻혀버린 것은 아닌지, 더더욱 성글고 얕은 지식 나부랭이를 무슨 대단한 이론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아는 체하고 잘난 체한 것은 아닌지,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되지도 않을 주장들을 일삼은 것은 아닌지 하는 것들이다. 어찌 견강부회와 표리부동이 없었겠는가. 있는 것들을 온전히 드러내고 가진 것들을 가감 없이 쏟아내는 것이 중요할 텐데, 분석한답시고 강조하고 자꾸 설명해서 덧대는 방식들, 식자층들이 가진 고질병 중의 하나이니, 내가 앓고 있는 식자병(識者病) 또한 꽤 깊지 않을까 염려된다. 다소 위안이 되는 것은 헛말이라도 메니아층들이 상당수 포섭되었다는 점이랄까. 내 노래를 들어주시는 독자층들은 물론 귀한 지면을 할애해주신 전남일보에 감사드릴 따름이다. 5년 전 내가 '남도인문학'을 표방했던 것은 그려지지 아니한 여백과 쓰여지지 아니한 행간에 주목하기 위함이었다. 갯벌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완충지대와 점이지대, 교섭의 공간들을 통해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아왔고 또한 살아갈 남도 민중들의 저력과 웅혼(雄渾)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도의 정체를 미래지향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시대담론 만들기라고나 할까. 드러나 있기 때문에 환호 받을 뿐인데도, 마치 전체를 대변하는 양 과잉 대표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자성과 내 나름대로의 분석에 따른 처방이기도 했다. 남도의 귄을 내세우고 몸짓과 노래를 내세우며, 정격(正格)의 신성보다는 도깨비 같은 부정격의 신성을, 남성보다는 여성을, 가진자들보다는 가지지 못한 자들을, 권문세족보다는 가난한 민중을, 완결된 예술이나 문학보다는 막걸리 한 잔 걸치고 고성방가하는 노래방의 풍경들을 주목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공부한 민속학이라는 학문의 경계를 넘어 '일상학'으로 전환했던 오래된 내 여정의 표방이기도 했다. 여백과 행간에 가려진 이들과 시공을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정신이라 여기는 마음 여전하다. 문제는 이 가치들을 내면화하고 있는 방식들이다.

4차산업혁명시대의 여백과 행간, 이세돌과 알파고에 견주어

지난 2016년 봄 세기적인 풍경 하나. 신안군 비금도 사람 이세돌과 알파고간의 바둑대결을 환기해본다.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최종결과 알파고가 4승, 이세돌이 1승을 거뒀다. 결과적으로 인간 이세돌이 인공지능 기계에게 패배한 셈이 되었다. 구글의 바둑 프로모션은 인공지능이라는 과학기술을 일반대중들에게 공개하는 시연 이벤트였다. 4차산업혁명시대의 도래와 인공지능에 대한 위상을 단 한 방에 알린 일종의 사건이라고나 할까. 인공지능 기술이 교육, 종교, 경제 등 우리 삶의 깊숙한 부분까지 침투하고 있음을 실감나게 하는 세기적 이벤트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인간은 인공지능과 대결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이세돌로 대표되었던 인간의 향방을 묻는 본질적인 질문일 수 밖에 없다. 도대체 4차산업혁명시대의 인간이 서있을 데는 어디인가 말이다. 실직과 소외를 예측하는 목소리들을 경청한다. 나는 수년 전 본지 칼럼을 통해 '공명을 깨부수고 공감을 상실해버린 시대'가 4차산업혁명시대라고 진단한 바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제4차 산업혁명의 향방이 인류의 행복이나 발전에 있지 않다는 것, 마치 알파고를 개발해두고 인간과 대결하여 이기고 지는 것을 따지는 발상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기술의 발달이 서로 공명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지는 않는 것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는 점 강조해두었다. 단서도 달았다. 이전 시대의 전체주의나 성찰 없는 공동체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전통사회의 모순은 모순대로 비판하고 극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잘난 사람들에게 종속되던 패턴이 인공지능에 종속되는 메커니즘으로 이행되는 것이라면 종살이의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 아닐까?

포스트 남도인문학, 다시 읽는 남도의 노래

4차산업혁명시대의 장밋빛 전망은 기왕의 질서에 대한 옹호와 편들기에서 심화되는 듯하다. 경제가 강조되고 기술이 강조되며 자타의 이익이 여전히 강조되는 것을 보는 내 시선일지도 모르겠다. 인구증가와 경제발전 지표가 이미 수축사회에 진입해 있음을 알려주거나 코로나19로 인한 패러다임 전환 담론이 득세하는데도 말이다. 가부장적 엘리트주의, 그 중에서도 파워엘리트들이 더욱 강조되는 일종의 악순환이라고나 할까. 천편일률적인 성장담론의 인공지능 논의들이 함의하는 것은 우리 안의 여백을 몰아내는 일에 다름없다. 서울중심에서 지역으로, 남성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서 여성 존중으로, 종족우월주의에서 다종족주의로, 중앙집권문화에서 문화다양성 존중으로 이행하고 있는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리라. 이것이야말로 여백에 투영되고 행간에 스며든 '하찮은 것들'을 다시 몰아내버리는 결과 아니고 무엇일까. 시대정신에 반하는 발전 지향적 마인드 즉, 수축사회에 대응하지 못하고 오로지 발전과 확장만을 화두 삼는 반시대적인 마인드로 보인다. 칼럼 200회를 자축하며 시대정신을 다시 돌아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잉 대표된 남도문화의 껍데기들은 무엇일까? 아니 질문을 바꾸어, 4차산업혁명시대의 시대정신을 횡단하는 남도문화의 알맹이들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여백과 행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권력 많고 재력 좋고 잘나서 남도의 대표로 회자되는 인물과 장소와 시간들 말고 그들의 배경이 되고 토대가 되었던 하찮은 사람들, 하찮은 공간들, 버려도 좋을 성싶은 그런 시간들 말이다. 서울을 해체하고 지방을 중심에 세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공지능을 중단하고 휴머니즘만을 강조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왕의 편향된 질서와 관념들을 뒤집어엎어 균형을 찾는 주역의 대대성(待對性)을 염두에 두라는 얘기다. 남도사람들이 수많은 이야기와 노래들에 저장해둔 은둔의 방식과 내면화의 방식을 톺아내어 포스트휴먼, AI시대의 포스트 남도인문학을 주창하는 까닭이다. 4차산업혁명시대의 전환기를 맞아, 5년여의 내 노래는 이제 포스트 남도인문학으로 전개된다. 도종환이 노래했듯, 이름도 빛도 없는 그런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아름다운 남도 사람이 아니다.

남도인문학팁

용과 지렁이, 하찮음으로 포장된 내면화의 방식

용이 중요할까 지렁이가 중요할까? 답은 정해져 있다. 동양의 인지체계 자체가 용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내가 칼럼을 시작하던 초기에 던졌던 화두 한 토막을 재소환해 본다. "광주 어느 고을에 사는 한 부자에게 예쁜 딸이 있었다. 어느 날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밤마다 보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와서 제 방에서 자고 간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명하였다. 오늘 저녁 다시 그자가 오거든 실을 길게 묶은 바늘을 옷깃에 꽂아두어라. 아니나 다를까 그자가 또 나타나니 아버지 시키는 대로 했다. 이튿날 아침에 그 실을 따라 갔다. 북쪽 담 아래 있는 기둥만한 지렁이에 바늘이 꽂혀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 후 딸이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니 나이 15세에 이르러 스스로 견훤이라 칭하였다. 이이가 경복원년에 완산군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일으켰다." 이후 지금의 광주 북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던 것은 누구나 아는 얘기다. 이 이야기는 광주에 광범위하게 전해지는 소사아저씨가 때려잡은 용 이야기와 연결된다. 소사가 용을 때려잡아 비가 온다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 소사아저씨가 용을 삽으로 찍어서 죽였다고도 한다. 비 올 때마다 길 위로 달려드는 지렁이를 표현한 것일까? 영산강의 시원 가마골 용소의 용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옛날 담양 고을에 풍류를 좋아하던 부사가 부임했다. 가마골 풍경이 좋더라나. 관속들에게 예고령을 내리고 경치를 구경코자 했다. 그런데 꿈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내일은 내가 승천하는 날이니 놀러오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부사는 백발노인의 말을 듣지 않고 가마골로 행차했다. 경치에 도취되어 있는데 갑자기 물이 끓어오르고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커다란 황룡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윽고 황룡은 부근 계곡으로 떨어져 피를 토하며 죽었다." 소사아저씨는 교사들에 비해 등급이 낮은 이른바 '하찮은' 직업으로 호명되었을 캐릭터일 것이다. 이 민중들이 때려잡은 용 때문에 비가 온다는 언설이 함의하는 바를 짐작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찮음으로 포장된 내면화의 방식들을 주목해야 할 이유랄까. 하찮음이 귀함으로 전환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신안갯벌. 뉴시스

장흥군 건강휴양림 '우드랜드'. 뉴시스

영산강.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