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남도소리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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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남도소리에 관하여
  • 입력 : 2020. 05.13(수) 13:21
  • 편집에디터

송순단 주재 재수굿(날받이)에서 민요를 부르고 있는 송가인(오른쪽)과 그 친구들

'남도학'과 '남도소리'

남도소리란 무엇일까? <한국호남학진흥원> 주관으로 '남도학'이라는 교재가 만들어졌다. 나는 그간 써두었던 기록들을 병합해 '남도소리' 항목을 집필하였다. 여기 그 일부를 소개하여 '남도소리'가 무엇인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은 무엇인지 밝혀두고자 한다. 협의의 남도소리는 '남도잡가'를 말한다. 1928년 평양 권번에서 예기(藝妓)들을 가르치기 위해 김구희가 엮었던 '가곡보감(歌曲寶鑑)'에 보면, 가곡, 가사, 시조, 서도잡가, 남도잡가, 경성잡가 등이 실려 있다. 남도잡가라는 이름이 일찍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잡가라 풀이해두었다. 전라도지역의 보렴, 새타령, 화초사거리와 경상도지역의 골패타령, 성주풀이 따위로 설명한다. 하지만 문화권역으로서의 남도는 호남의 이칭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호남지역의 잡가로 범주를 좁히는 것이 유용하다. 그런데 육자배기, 농부가, 진도아리랑, 흥타령 따위를 거론하게 되면 잡가의 범주를 넘어선다. 토속민요을 포함하는 호명방식이기 때문이다. 흔히 남도지역의 '창(唱)'이라는 뜻으로 '남도창'이라 한다. 판소리를 포함하는 인식이다. 여기에서 광의의 남도소리에 대한 개념이 대두된다. 민요, 잡가를 포함해 판소리, 시조, 가곡, 무가, 나아가 남도에서 노래했거나 남도를 노래한 모든 장르를 포괄하는 개념 말이다. 따라서 광의의 남도소리는 남도의 모든 노래를 포섭하는 개념이다. 이들 모두를 대표하는 곡목이 육자배기다. 흥그레타령에 토대한 이 노래는 문학적으로 따지면 민요와 잡가를 거쳐 가요까지 연결된다. 한(恨)과 흥(興)의 정서가 어떤 장르들까지 파급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금은 연구가 무르익지 않았지만, 재창조 100여년을 앞두고 있는 트로트 또한 남도소리의 한 분파로 개념화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남도학'이 씨줄 날줄의 시공을 교직하는 현재적 어떤 정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마땅히 남도소리의 개념범주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도를 상징하는 토대소리 흥그레타령과 민요 육자배기

흥그레타령으로부터 발전한 육자배기가 근대기를 거치면서 전문가들에 의해 재창작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를 통속민요 혹은 남도잡가 등으로 호명한다. 토속민요나 향토민요와 구별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토리권을 주장했던 이보형의 연구에 의하면 남도잡가 육자배기는 '흥그레타령-김매기 산타령-옛 육자배기-근대 육자배기'의 변천과정을 거친다. 나도 이 견해를 받아들여 흥그레에서 육자배기로의 변이를 주장해왔다. 김혜정 교수도 향토형 육자배기와 잡가 육자배기로 나누어 접근한바 있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에 경서도 잡가의 유행에 영향을 받아 잡가로 변화되었다. 흥그레타령에서 출발한 향토민요 육자배기가 당시 유행하던 유랑패들의 영향을 받아 잡가로 재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도잡가 <흥타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천안삼거리 흥~ 능수나 버들은 흥~"하는 흥타령이 있다. 이것은 '천안삼거리'에서 유래한 노래로 일명 <경기민요 흥타령>이라 한다. 후대에 와서는 잡가 <흥타령>으로 재창조되어 널리 불렸고 특히 시조형식으로 재창조되어 시가문학의 한 유파를 이룬바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듣는 "아이고 대고 허허~응 허~성화가 났네 헤~"하는 <남도잡가 흥타령>은 어떤 노래인가? 손인애 교수는 이 노래의 형성 시기 및 그 과정이 사당패소리에 근거한 경서도 통속민요와 흡사하다는 점, 따라서 남도 사당패 계승집단 또는 그 영향을 많이 받은 집단이 형성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잡가 육자배기의 재창조과정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남도잡가 흥타령의 정서와 한(恨)의 세계는 육자배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재창조의 과정에 보렴, 화초사거리, 긴육자백이, 자진육자배기, 흥타령, 새타령, 성주풀이, 개고리타령 등이 함께 한다. 오늘날 남도잡가 메들리로 통칭되는 노래들의 존재가 근대기를 거치면서 완연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진도아리랑을 덧붙이는 형태로 고정되었던 것이다.

남도지역 유희요에 대한 갈래 인식의 역사

남도민요를 포함한 한국의 민요는 대개 일을 하면서 부르는 노동요, 놀면서 부르는 유희요, 의식을 치루면서 행하는 의례요, 여기도 저기도 포함되지 않는 기타노래 등으로 나눈다. 일종의 연구 관행이다. 고위민은 1941년 '춘추지'에 '조선민요의 분류'라는 글을 기고했다. 고정옥은 1949년 '조선민요연구'를 통해 민요를 11항목 71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이외 여러 학자들이 민요의 갈래를 연구했다. 1992년 제주도를 시작으로 1976편의 전국민요 음원을 수록한 MBC민요대전의 분류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 최상일 PD의 업적이다. 노동요, 의례요, 유흥요, 기타요로 분류해두었다. 소모는 소리나 말 모는 소리를 비롯해 애기 어르는 소리 등 음영가요까지 민요의 범주에 포함시켜두었다. 나는 이를 민요의 일생사 혹은 연령층별 민요 부르기로 재편하여 논의한 바 있다. 일생 의례적 불가역성에 대응하는 즉, 한번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인생에 대응하여, 민요의 순환성을 드러내보고자 하는 취지로 쓴 글이다. 민요를 포함한 노래는 수많은 분화과정을 거쳐 다양한 장르와 분야로 특화되어 왔다. 트로트니 힙합이니 하는 장르 이름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민속놀이니 여흥놀이니 따위로 호명되는 통칭 '놀이'는 노래 이전의 정보 즉, 노래와 놀이가 분화하기 이전의 정보들을 다루고 있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하(1872~ 1945)가 일찍이 인간을 '호모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으로 규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심지어 종교와 전쟁까지도 놀이로 해석했다. 나는 남도의 소리 중심으로 견해를 정리하면서, 궁극적으로 이 놀이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이익관계 중심으로 재편되어버린 인류사의 질곡을 헤쳐 나갈 방편과 해법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남도소리, 갇힌 과거를 넘어서

민요라는 호명이 전제하는 개념은 민족과 민중이었다. 삼일운동 이후인 1920년대부터 민요가 '민족의 노래'로 정립되면서 가요와 분리되기 시작하였다는 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 결과로 전대 '가요' 혹은 '동요'로 불리던 '수심가'나 타령류의 노래들이 '민요'로 호명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후 '비판'과 '개량'의 대상이었던 노래들이 지식인들에 의해 재발견되고, 선별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가요와 민요의 분리가 일어난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민족이란 개념의 민요 전유에 있을 것이다. 수입 민속학이 초창기 발흥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후 '전통'이라는 틀 안에서 통용되던 '가요'는 근대적 의미의 '유행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박애경은, '민요'라는 양식으로 정립된 전대의 가요가 당시 대중성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유행가의 외곽으로 밀려나는 행간을 잘 분석하고 있다. 가요라는 호명은 발흥하고 민요라는 호명은 축소되기 시작했다. 민요의 재구성이 필요했다. 신민요 발생은 이로부터 발생하게 되었다. 양지영은 그의 글 ?신민요를 통해 본 조선적인 것-노구치 우조, 조선민요의 연구, 김사엽을 중심으로?에서 관련 정보를 자세하게 분석해두었다. 신민요라는 것은, 과거에 갇힌 민요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현재라는 역사성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것. 가변하는 '조선적인 것'이 내포한 전통성을 잇는 매개체였다고 주장했다. 신민요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민족의 노래로 대표되는 민요를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문제와 연결된다. 이는 '조선적인 것'에서 '한국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전통성과 역사성을 되묻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소영은 '식민지 근대의 잡가와 민요'라는 글에서 민요라는 용어와 그 개념 전개가 근대적인 시선의 개입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전래된 노래로서의 제반 전통가요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식민지 근대라는 맥락 속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구축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전근대의 표상으로서 잡가로 인식되었던 통속 민요가 민요라는 용어를 부여받고 음향과 노랫말 차원에서 재구성된 것은 식민지 근대라는 자장 위에 근대적인 담론 체계가 작용한 문화변용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민족 혹은 민중담론에 갇히면서 신민요로 출구를 열었으나 남한에서는 유행가요의 그늘에 다시 갇혀버렸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담보하는 신민요 곧 창작곡을 민요로 취하면서 많은 변화들을 도모했다. 선악과 시비를 넘어, 지금, 여기, 우리가 연행하고 소비하는 노래 그 자체를 주목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남도인문학팁

남도소리, 민요와 가요의 자장(磁場)

한자어 '민요(民謠)'는 성종실록에 한 차례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민요'보다 '민속가요'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세종실록, 성종실록, 중종실록, 명종실록, 효종실록에 각 1회씩 5회 출현한다. 지배 권력을 갖지 못한 백성들이 불렀던 노래를 지칭하는 개념어는 민요가 아닌 '이요(俚謠)'였다. 속된 노래라는 뜻을 갖는 '이요'는 한자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한글로 지어 부른 노래를 지칭하는 말이라 해석된다. 배인교가 '일제강점기 민요의 개념사적 검토'라는 논문에서 자세하게 논의해 두었다. 여기서의 '민속가요'가 속가(俗歌) 혹은 민요(民謠)다. 그렇다면 '이요'로 호명되던 노래가 어찌 민요라는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는가. 선학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한 바는 1920년대 민요의 발견 혹은 재발견이다. 민족과 민중이란 이름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따라서 이 용어의 남상(濫觴)과 태동은 가요와의 병립 속에서 추적해야만 한다. 20세기 초 계몽의 시대를 거치며 종묘제례악에 쓰이는 의례용 음악에서부터 여자 기생들의 노래와 민간의 노래를 두루 일컫던 명칭은 '가요'였다. 고려민요라고 하지 않고 고려가요라 하는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임경화는 그의 논문 '민족에서 인민으로 가는 길: 고정옥의 조선민요연구의 보편과 특수'에서 가요와 민요의 분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 호명은 점차 서민예술에 기반한 전통적 노래 양식을 지칭하는 말로 의미의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가요를 '민풍(民風)'의 차원에서 접근했던 시기였다. 이 때의 가요에 대한 생각은 '풍(風)'의 요체를 민속가요의 시 혹은 여항(閭巷)의 노래에서 기원한 노래로 규정한 '시경(詩經)' 이래의 전통이다. 주지하듯이 '시경'의 50% 이상이 '풍(風)'이라는 민요다. '민요'라는 용어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긴 하지만 사실상 새로 발명된 용어다. 민속, 민예, 민중 등 1900년대 초반 수입된 용어들을 일본어를 거쳐 번역했다. 'Volkslied'의 번역어가 민요인데 두 가지 뜻이 있다. 타민족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노래'라는 의미가 첫째요, 문명의 상징인 문자를 향유해온 특권계층에 대해 구술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피지배 계층으로서의 '민중의 노래'라는 의미가 두 번째다. 일본어의 번역어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되어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이 용어는 당초부터 지방성이나 계급성, 문화적 차이가 민족으로 수렴되는 '민족의 노래=민중의 노래'로 일원적으로 파악되었다.

토속민요를 연행하는 진도 인지리 사람들

남도민요 명창들(좌로부터 강송대, 전정민, 조소녀, 박진섭)

남도민요를 잘 불렀던 들노래 인간문화재 고 조공례

남도민요의 대가로 불렸던 고 조공례 인간문화재

대를 이어 남도민요를 불러온 강송대 명창 가족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