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부처님오신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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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부처님오신날
  • 입력 : 2020. 04.15(수) 15:33
  • 편집에디터

마야부인과 하얀코끼리의 꿈 조각-위키백과

진한(辰韓)땅 여섯 마을 지도자들이 알천의 상류에 모였다. 나라를 다스릴 군왕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높은 산에 올라 먼 남쪽을 보니 양산 기슭 나정이라는 우물가에 번개와 같은 신이한 기운이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가보니 흰말이 자줏빛 알에게 경배하고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이 알에서 사내아이가 탄생하였다. 동쪽 샘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새와 짐승들이 더불어 춤추고 하늘과 땅이 흔들리며 해와 달이 청명하였다. 이 아이 이름을 혁거세라 짓고 위호를 거슬한이라 했다. 나라의 지도자가 생기니 사람들이 다투어 배필을 구하려했다. 마침 같은 날 알영 우물가에 계룡이 나타나 겨드랑이에서 딸아이를 낳았다.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의 북천에 가서 목욕시키니 부리가 떨어졌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태어났고 알이 박과 같으므로 성을 박씨로 삼았다. 딸은 우물에서 태어났으므로 그 이름을 본 따 알영이라 했다. 이들 나이 열셋이 되니 왕과 왕후로 삼았다. 계정(鷄井) 곧 닭의 우물에서 태어났으니 나라 이름을 계림국이라고 하고 서라벌, 서벌, 사라, 사로 등으로 부르다가 신라고 고쳐 불렀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전하는 박혁거세신화다. 내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 귀가 닳도록 들은 옛날이야기이기도 하다. 전북 부안 죽막동의 개양할미도 겨드랑이에서 여덟 딸을 낳아 전국 팔도로 보내 다스리게 한다. 홍련암을 비롯해 전국의 수많은 지명과 지혈에 각양의 이름으로 전래되는 이야기들이 이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모두 여음굴(女陰窟)의 비유로 설명 가능하다. 여성의 생산성, 재화와 복락에 대한 욕망들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는 관념들이자 설화적 장치들이다. 주로 겨드랑이나 계곡에서 탄생하고 동쪽의 흐르는 물에 씻기는 풍경으로 묘사된다. 이들 이야기의 기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부처 탄생에 빗대어 이들 설화를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계룡 겨드랑이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와 부처의 탄생

부처는 마야부인의 왼쪽 겨드랑이에서 태어났다. 오른쪽 겨드랑이 혹은 옆구리라고도 한다.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어가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하였다. 이를 석가모니의 탄생게라 하는데, 천신계와 인간계에서 내(붓다)가 가장 존귀하다는 깨달음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항간에 이 언설을 인간의 독선에 비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러 버전들이 있다. 부처 탄생설화는 여러 경전에서 반복적으로 재구성되었다. 어느 여름날이었던가 보다. 카필라바스투 축제의 일곱째 날이었다. 마야부인이 잠시 잠이 들었는데 천상의 사천왕들이 잠든 그녀의 침상을 히말라야 정상으로 옮겼다. 끝이 보이지도 않는 거대한 사라수 나무 아래 침상을 놓았다. 천신의 부인들은 마야부인을 아노따타 연못으로 데려가 목욕시켰다. 다시 황금의 집안에 있는 침상에 누이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했다. 이때 흰코끼리였던 미래의 붓다가 마야부인을 향해 북쪽으로부터 다가갔다. 흰 연꽃을 쥐고 큰 소리를 내며 마야부인이 있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마야부인을 중심에 두고 오른쪽으로 세 번을 돌고나서 옆구리로 들어갔다. 잘 알려진 붓다의 태몽이야기다. '불소행찬'에 의하면, 우류왕은 다리로 태어났고 비투왕은 손으로 태어났으며 만타왕은 정수리로 태어났고 가차왕은 겨드랑이로 태어났다. 자궁의 은유가 겨드랑이나 옆구리뿐 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수 탄생설화인 마리아도 연상하게 해준다. 탯줄 없는 탄생, 신성을 전제하는 동정녀를 강조하는 구성들이다. 마야부인은 붓다를 낳은 지 7일 만에 죽게 된다. 여기서의 7일이 우리 풍속의 북두칠성 즉 칠성신앙 등과 관련 있을까? 하지만 인도를 중심으로 한 불교의 숫자 7과 관련하여 해석해야한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태어나서는 세 번의 칠일이 키워드인데, 불교관념에 의하면 죽어서 일곱 번의 칠일이 키워드다. 선험적으로야 칠성과 관련하여 해석하고 싶지만 간단하지 않다. 박혁거세와 알영의 탄생설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영웅탄생설화에 비정된 암호들을 풀이하는 방식을 획일화할 수는 없다. 불교는 불교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부처님오신날과 욕불식

예수 탄생설화도 동방박사 세 사람의 스토리로 재구성되었다. 동정녀 마리아와 구유의 탄생, 빛나는 별, 금은보화와 경배 등의 설정들이 그러하다. 부처님이라고 다를 바 없다. 부처가 탄생하니 하늘에서 구룡(九龍)이 내려와 아기 부처를 목욕시키며 그의 탄생을 찬탄한다. 아이의 목욕과 신성한 물, 이것이 관욕식(灌浴式) 곧 아기부처님을 목욕시키는 의례에 대한 기원설화다.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탄생불을 욕불기(浴佛器)에 모셔놓고 바가지에 물을 담아 씻는 의례다. 그래서 석가탄신일을 욕불일(浴佛日)이라고도 한다. 불탄일에 이 의례를 병행하는 것은 생명의 탄생을 넘어서는 재생과 부활 맥락들이 들어있다. 하지만 탄생불을 목욕시키는 이 의례는 어느 시기 자취를 감추게 된다. 욕불식인 관불회(灌佛會)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초파일을 욕불일로 불렀다는 것 정도가 가장 유력한 전거로 인용될 뿐이다. 하지만 명확한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백제가 일본에게 불교를 전해줄 때 태자상과 관불도구를 함께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노성환은 '한일 초파일의 민속에 관한 비교연구'에서, 이 기록이 백제에 이미 관불회 행사가 있었음을 증명해준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석가탄신일의 주요 행사였을 관욕식이 왜 사라졌던 것일까? 아마도 조선시대 불교의 쇠락과 관련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금은 연등행사와 더불어 다시 초파일 주요 행사로 복원되었다. 초파일에 관불식이 거행되는 것은 그만큼 불교의 세가 강해졌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부처님오신날, 불과 물의 정화를 생각하며

삼국사기에 보면 봄 정월 15일에 임금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관람하고 그 자리에서 백관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다. 고려시대 연등회는 정월 대보름날 혹은 2월 보름, 사월 초파일 연등회가 있었다. 이때는 채산, 채붕, 등산 등 무대장치를 만들고 각양의 연희를 공연했다. ??고려사?? 권9 문종계축 27년에 보면, 2월 정유일에 왕이 봉은사에 가서 연등회를 특별히 열고 이틀 밤에 걸쳐서 각각 3만개의 등불을 밝혔으며 중광전과 각 관아에는 모두 채단으로 장식하며 다락과 등산을 설치하고 풍악을 잡혔다고 했다. 불교국가였던 삼국시대, 고려시대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까지 지금의 연등행사보다 훨씬 광범위한 연등행사가 다채롭게 열렸음을 알 수 있다. 불의 연등의례, 물의 관욕의례, 부처님오신날 행사는 두 가지를 병행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조선시기 없어졌던 관불 혹은 관욕식의 부활된 것이다. 구미래는 '천도재에서 관욕의 상징성과 수용양상'이란 글을 통해, 관욕식은 바라문교의 신상(神像)정화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대보적경'의 기록을 참고한다. 사위성 파사닉왕의 여덟 살 난 공주 무구시가, 2월 8일 비성(沸星)이 나타나는 날에 5백 명의 바라문과 함께 물을 가득 담은 병을 들고 성 밖으로 나가 천상(天像)을 목욕시키는 장면이 등장한다. 신성존재를 대상으로 한 정화의식이 초기불교 당시부터 부처님을 씻어주는 관욕개념으로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성(沸星)은 무엇인가. 이십팔수 가운데 귀수(鬼宿), 복덕이 있는 상서로운 별이다. '장아함경'에 이르기를, 부처님께서도 비성이 나타날 때 태어나셨고 출가하였으며, 도를 이루고 멸도하셨다고 했다. 망자를 기리는 천도재에서 관욕식이 의례화되고, 무속의 씻김굿에서 망자의 영혼을 씻는 의례가 정착된 전거라고나 할까. '보요경'에서는, 부처님이 탄생했을 때 천제석과 범왕이 홀연히 내려와 갖가지 향수로 목욕시키고 구룡은 하늘에서 향수를 뿜어 목욕시켰다고 했다. '과거현재인과경'에는 난타 용왕과 우바난타 용왕이 공중에서 깨끗한 물을 뿜어 한 줄기는 따스하고 한 줄기는 시원하게 하여 태자의 몸에 부었다고 했다. 룸비니 동산에서 갓 태어난 아기부처를 하늘의 용들이 물을 뿌려주어 씻어주는 풍경들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재구성된다. 예수의 탄생과 세례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세례요한은 요단강의 물로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각종 기독교 종단에서 이 세례방식을 재생과 거듭남의 의식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불교신자도 아닌데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어찌 한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는가만, 역병으로 뒤죽박죽된 마음의 환란들 연등(燃燈)으로 재생하고 더럽혀진 마음들 관욕(灌浴)으로 씻어 거듭날 수 있기를 다만 기대해보려 한다.

남도인문학팁

연등(燃燈)과 관등(觀燈)의 부처님오신날

'불설시등공덕경'에는 등을 바치는 것은 연등이고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관등이라고 했다. 연등과 관등은 같은 말이지만 고려시대까지는 연등이라는 국가적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 같다. 조선시대에 민간 주도의 행사로 치러지면서 관등이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어쨌든 인도를 포함해 부처님오신날 행사의 백미는 관욕식 보다는 연등식이다. "세조 조에서는 전경법을 시행하였다. 고려 때의 옛 풍습이다. 그 법은 번개가 앞에서 인도한다. 누른빛 나는 방같이 생긴 가마에 작은 황금 부처를 봉안하고 앞뒤에서 광대가 주악하며 간다. 양종의 승려 수백 명이 좌우로 갈라서 따라간다. 각각 좋은 향을 받들고 불경을 외운다. 상자중은 수레에 올라 북을 친다. 경 읽는 소리가 그치면 음악소리가 일어나고 음악소리가 그치면 경 읽는 소리가 일어난다. 부처를 받들고 대궐에서 나오면 임금이 광화문까지 납시어 배웅한다. 온종일 시가를 돌아다닌다. 각 관사의 관리들이 다투어 달려가서 공물을 올리며 오직 부처의 성냄을 입을까 두려워하였다. 사대부 집안의 여자들이 물결처럼 달려가서 구경하였다." '용재총화'에 기록된 경행이라는 행사 풍경이다. 노성환에 의하면 이 행사는 고려의 정종 때 시작되어 탑돌이 등 일련의 국가적인 행사로 발전된 것인데 이후 없어졌다가 세조 때 복원된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의 행사로 연등행사와 탑돌이, 제등행렬 등이 근간인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들 불교행사들이 민간의 세시풍속과 습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조상에 대한 제사나 산놀이 등과 연관하여 광범위하게 열렸기 때문이다. 화전놀이와 병행하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조상묘를 찾는 시제와 병행하는 지역도 있다. 산에서 내려올 때는 진달래 꽃다발을 만들어 내려오기도 한다. 이를 꽃방망이 곧 여의화장(如意花杖)이라 했다. 이 꽃방망이로 선비의 머리를 때리면 그 해 과거에 급제하고 기생의 등을 치면 기생이 친 사람에 대한 상사병을 앓게 된다는 놀이다. 그래서 어떤 총각들은 야밤에 숨었다가 마음에 드는 처녀들의 뒷머리나 뒷등을 진달래 꽃방망이로 치는 풍습이 있었다. 4월 초파일과 관련되어 있는데, 왜 초봄의 진달래꽃일까? 정월대보름에서 2월 대보름까지, 그리고 삼월삼짓날 봄맞이까지 일련의 세시풍속들이 부처님오신날의 의미와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교신자들이야 부처님의 공덕에 의지하여 의미를 부여하겠지만 민간과 습합된 풍속들은 오히려 시작, 재생, 부활의 연시 의례적 의미들이 강화되어 나타난다. 부처님오신날의 근원적 의미를 톺아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부처님 오신날 연등. 뉴시스

부처님 오신날 연등. 뉴시스

지난해 부처님오신날 행사가 열린 광주 서구 무각사(주지 청학스님)에서 불자들이 아기 부처에 물을 부어 씻겨주는 관불 의식을 하고 있다. 김양배 기자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