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붉은악마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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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붉은악마의 추억
  • 입력 : 2020. 04.01(수) 13:12
  • 편집에디터

2014 브라질 월드컵 H조 조별리그 2차전 대한민국과 알제리의 경기가 열리는 6월 23일 새벽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붉은악마가 태극기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뉴시스

2002년 월드컵 뉴밀레니엄의 시작

광장 한 복판으로 한 무리의 도깨비들이 쏟아져 나왔다. 낮밤을 가라지 않았다. 낮도깨비, 밤도깨비들이 섞여 나오니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었다. 모두들 붉은 옷을 입었다. 머리에도 붉은 띠를 둘렀다. 얼굴에도 붉은 칠을 했다. 태극기를 몸에 두르거나 치장을 했다. 모든 것이 붉은 색이었다. 아이 도깨비, 어른 도깨비 남자 도깨비, 여자 도깨비, 반상의 구별이 없었고 지위의 고하가 없었으며 성별의 차이도 없었고 빈부의 격차 또한 따져 묻지 않았다. 개별적으로 나왔으니 개인이었고 함께 뭉쳤으니 공동체였다. 2002년 한국의 모든 광장에서 일어난 괄목할 만한 풍경. 어떤 이들이 도깨비 무리라고 표현했던 이 현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 없으리. 이들을 자타가 붉은악마라 불렀다. 악마라니! 고지식한 어떤 이들은 악마라는 낱말에 불쾌해 하기도 했다. 아무려면 붉은 천사라고 부를까? 그러나 상관치 않았다. 페이크 펀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시천년' 뉴밀레니엄을 기획한 어떤 도깨비들의 장난이었을지도 모른다. 붉은악마로 호명되던 광장의 물결, 많은 연구자들은 이 현상을 레드 신드롬이라 불렀다. 남북 분단의 시대를 거치며 불온한 색깔의 대명사였던 붉은색이 관습적 대표성을 탈각했던 것일까? 공포와 두려움으로 포장되었던 반공, 빨갱이, 불조심 따위의 적색 기호가 순식간에 열광의 색깔로 바뀌어버렸으니 말이다. 분단모순이 일시적이긴 했지만 사라졌던 것 같기도 하다. 혹은 붉은색에 대한 기호와 경계에 대한 세계의 시선들이 그리고 그 흐름이 바뀌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미처 이해하지 못했지만 붉은색에 대한 금기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뉴밀레니엄의 시작과 보조를 맞춘 기획이라니. 오래된 천년이 가고 새로운 천년이 오는 길목을 장식한 명백하고도 확실한 기호였다고나 할까. 기업들은 이때로부터 붉은색을 소재 삼아 마케팅에 열을 올렸고 국가도 본의 아니게 우리나라를 상징할 만한 정체성(아이덴티티)으로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도깨비와도 같은 이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다시천년'의 도도한 기점을 통과했던 의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자발적이고도 충동적인 붉은 색깔의 축제를 도대체 누가 추동하였던 것일까?

Be the Reds!

2002년 월드컵 4강을 달성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붉은 물결, 이름을 어떻게 짓든지 이 현상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획기적이고도 자발적인 사건이었다. 누가 나오라고 해서 나간 것도 아니고 붉은 옷을 강요해서 입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능동적인 에너지들이 분출한 문자 그대로 창조적 축제였다. 일시적이긴 했지만 지역과 성별을 넘어 세대와 계층을 넘어 '우리'를 외쳤다. '대~한민국'이란 구호를 국악장단의 하나로 해석하느라 바빴다. 리듬의 격절을 핑계 삼아 엇모리장단이라고 주장한 이들이 있었다. '오~필승 코리아'로 단일민족의 함성이 삼팔선 남쪽 전역에 울려 퍼졌다. 마치 집단최면에 걸린 듯 했다. 붉은 옷, 붉은 머플러, 아이들에서 노인들까지 페이스페인팅(face painting,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다. 붉은색의 본질적 색감 성향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세대들이 마치 붉은 혈기가 분출하는 것처럼 몇 달간 흥분에 휩싸인 시기였다. 가장 현저했던 구호는 'Be the Reds!' 비틀즈의 'Let it Be!'를 연상하게 하는 이 구호는 문자 그대로 빨간 색의 실천이었다. 이를 두고 누구 하나 6.25전쟁의 북한군 깃발이나 혐오와 배제의 '빨갱이'를 떠올리지 않았다. 박영철씨가 디자인한 글씨는 전형적인 붓글씨였다. 'R'자는 숫자 12를 상징하는 등 민족적인 의미부여도 각별했다. 언제부터 이 낮도깨비들이 나라를 지키는 정령이라도 되었던 것일까? 태극기, 엇모리장단, 오~필승 코리아, 숫자 12, 이들 키워드를 관통하는 주제는 나라 혹은 민족 따위의 그런 개념들이었다. 그것도 불온의 대명사 붉은 색깔로 도배를 하면서 말이다.

붉은악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붉은악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2020년 아카데미 4관왕을 휩쓸며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영화 '기생충'에서 아버지 기택(송강호)이 아들에게 불쑥 던지던 말을 생각한다. 농담처럼 던지는 이 언설이 가지는 아우라가 깊다. 코믹으로 가장한 이 중층적인 우문(愚問)의 형식은 이미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정착한 것 같다. 천년이 가기 전 계획을 세워두고, 새로 올 천년의 시작으로 월드컵 2002년을 맞이했다고나 할까. 공식적인 국가대표팀 응원단이 아니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2006년 운영진 해체를 결정하지만 이들이 남긴 여운이 생각 이상으로 방대하다. 의도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1997년부터 2017년까지라는 엠블렘의 표기가 주는 파장들이 있다. 20세기를 넘기고 21세기를 맞이하는 뉴밀레니엄의 분기점을 시사해준다고나 할까. 붉은악마라는 별명은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이 먼저 사용하고 있던 호명이다. 문자 그대로 직역해보니 붉은 세 자매 복수의 여신이다. 머리카락은 뱀이고 날개를 달았다. 그리스와 로마신화를 통해 알려진 이 신화는 호머의 일리아드 등에 나타난다. 죽은 자의 분노에 대한 초자연적인 의인화다. 그런데 이 분노의 세 여신을 왜 붉은악마로 번역했을까? 성격을 같이 하는 우리의 여신 특히 분노하는 여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PC통신을 통해 제안되었다던 명칭들에서 대강의 고충이 보인다. '레드월리어', '버닝파이터즈', '레드헌터', '레드맥스', '레드컨쿼리', '쿨리건', '레드타이거', '레드에코', '레드유니온', '레드일레븐' 외에 '꽹과리부대', '도깨비' 등 주르르 쏟아진다. 이들이 어떤 이미지들을 연상했는지 대강의 윤곽이 보인다. 태극기를 앞세운 에너지라든가 기운생동을 포괄하는 이미지가 대표적으로 채택되었다. 그 핵심이 치우천왕 깃발이다. 그들이 제안했던 꽹과리부대나 도깨비의 이미지에 가장 어울리는 캐릭터였을 것이다. 붓글씨 도안이나 숫자 12, 국악장단 등의 기획이 모두 이 아이디어와 연결되어 있다.

다시천년, 개인들의 새로운 공동체로

뉴밀레니엄의 변화들이야 각계각층 각 장르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나현신,김현주의 「뉴밀레니엄시대 패션에 나타난 '페이크 펀(fake fun)' 디자인」을 참고한다. 2000년 이후 기성복 컬렉션을 보면 오브제의 쓰임새를 엉뚱한 위치로 이동시키거나 착용 위치를 뒤바꾼 스타일 등의 위치 왜곡, 의복의 일반적 형태를 왜곡하고 정상적인 착장 형식을 파괴하는 형태 왜곡, 눈속임 기법 등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한 조합과 부조화를 통한 일탈 등이 일상화된다. 보는 이에게 유쾌한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 '페이크 펀'이 뉴밀레니엄 시대의 주요한 트렌드로 자리매김했을까? 기왕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키거나 희화화 시키는, 그래서 새 시대를 보다 즐겁고 재미있게 맞이하는 태도들이 두드러졌음을 보여준다. 마치 장난을 좋아하는 도깨비들의 심성이라고나 할까. 이제는 누구 눈치 보지 않고 권세에 주눅 들지 않으며, 기성의 양식과 제도를 비틀어 조롱하거나 비판하고, 그것을 당당하게 패션이나 각 장르들의 전면에 내세우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월드컵 축구 응원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일사 분란한 동원 체제를 강조하는 듯 보여도 사실은 페이크 펀에서 보여주는 놀이의 수단이기도 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월드컵 응원에 놓인 이 중층적이고 양가적인 태도는 이후 벌어질 촛불집회로 승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러나 이것이면서 저것이기도 한 복합적인 존재의 의미를 거리낌 없이 쏟아낼 수 있는 준비를 하였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기왕의 좌파, 우파의 구분법을 뛰어넘어, 붉은 치장을 두르고 붉은악마가 되었다가 광장의 촛불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이제 2000년 뉴밀레니엄을 맞이하고 두 번의 십년을 보내고 있다. 이전의 천년과 새로 온 천년은 시간의 분절이라는 관습적 기점의 어떤 비전들을 설정하였나? 만약 설정하였다면 그 비전은 어떻게 이행되고 있나? 한국의 크고 작은 광장을 가득 메우면서 뉴밀레니엄을 열었던 붉은악마와 함께 분노의 여신, 페이크 펀, 내셔널리스트 치우의 등장을 다시 주목해보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붉은 흐름이 어찌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 톺아보는 것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왜 '다시천년'의 기점에 이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그 의미는 또 무엇일지 추적해보는 시간을 마련해보려 한다. 거듭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통과의례였다는 것, 이 의례를 통과하지 않으면 뉴밀레니엄을 도저히 열 수 없었던 불가피한 놀이였다는 점이다. 고작 일 년이 그렇고, 한 세기도 그럴진대 아무려면 한 천년이 그냥 올수야 있겠는가. 나는 지금 유쾌한 반란, 다시천년 벽두의 붉은악마를 애틋하게 추억하는 중이다.

남도인문학팁

분노의 세 여신과 치우천왕기

이들이 상징으로 내세운 '치우천왕기'는 2002년 월드컵을 정점으로 전국화 되기에 이른다. 국가에서 채택하지 않았을 뿐, 일반인들에게는 한국을 나타내는 엠블렘(emblem, 전형적인 상징)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뉴밀레니엄을 기점으로 급변한 관광문화 측면의 국가적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붉은악마 치우천왕의 이미지가 얼마나 현격하게 부상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1970에서 1980년대 산업부흥기에는 아리랑, 고궁, 전통춤 등의 이미지들이 한국을 상징했다. 1990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밀레니엄 말기에는 레져, 스포츠, 쇼핑 등 체험과 관광형태의 이미지로 변화된다. 이것이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붉은악마, 축구, 정보기술, 태극기나 '대~한민국'이라는 구호 등으로 재구성되기에 이른다. 때마침 한 천년이 가고 새 천년이 오는 기점이었다니 이 얼마나 오묘한 조화란 말인가. 국가 이미지로 등극한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매우 현저하게 밀레니엄을 가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명징한 장면 전환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을 손꼽아보면 '다시 천년'을 충족할 그 무엇이 부상할 수 있겠는가? 하다못해 한 편의 드라마 서사라도 어떤 분기점을 지날 때는 스펙터클한 장면을 구성하지 않는가 말이다. 일 년의 한 기점 설날을 보내기 위해서는 설빔을 입고 조상에게 제례하며 묵은 한 해를 씻어 보낸다. 하물며 일백년도 아니고 천년이 가고 다시 천년이 오는 기점이지 않은가. 자연발생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알지 못할 기운들의 추동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바로 이때 '치우천왕기'가 나타나고 '붉은악마'를 외쳤던 것이다. '도깨비'들을 능가하는 명실상부한 도깨비 같은 획기적인 장면전환, 이보다 더한 장면이 있을까 싶을 만큼 스펙터클한 장면들이었다. 이전의 레드콤플렉스를 순식간에 벗어 제치며 새로운 시대 패러다임으로 부상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 현상은 분명히 '다시천년'을 가르는 장면 전환이었다. 헌 천년을 보내고 새 천을 맞이하는 통과의례였다.

2014 브라질 월드컵 H조 조별리그 2차전 대한민국과 알제리의 경기가 열리는 6월 23일 새벽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붉은악마가 태극기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뉴시스

2014년 6월23일 브라질 월드컵 H조 예선 두 번째 경기, 대한민국과 알제리전이 열린 23일 새벽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에서 붉은악마가 분장을 하고 있다. 뉴시스

2014년 6월23일 브라질 월드컵 H조 예선 두 번째 경기, 대한민국과 알제리전이 열린 23일 새벽 서울 강남구 영동대로에서 붉은악마가 분장을 하고 있다. 뉴시스

2012 런던올림픽 한국과 일본의 축구 3·4위전 경기가 열리는 8월 11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광장에서 응원하는 수 많은 시민이 후반 구자철이 추가골을 넣자 열광하고 있다. 뉴시스

2017년 8월 3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9차전' 대한민국과 이란의 경기, 한국의 붉은 악마들이 열띤 응원을 하고 있다. 뉴시스

2017년 8월 3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9차전' 대한민국과 이란의 경기, 한국의 붉은 악마들이 열띤 응원을 하고 있다. 뉴시스

2017년 5월 20일 오후 전북 전주시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코리아 2017' 대한민국과 기니의 개막전 경기에서 한국의 붉은 악마가 응원을 하고 있다.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