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늘을 목 놓아 통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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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칼럼
다시 오늘을 목 놓아 통곡한다
  • 입력 : 2019. 02.26(화) 13:01
  • 이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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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이 맺어졌던 1905년 11월 19일 늦은 오후.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이 사설 한 편을 썼다. '오늘을 목 놓아 통곡한다'(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는 글이었다. 일본 군국주의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지 이틀이 지난 이 날 장지연은 망국의 한을 달래며 술잔을 기울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붓을 들었을 게다. 그리고 을사늑약을 체결한 정부 대신들을 개·돼지만도 못하다고 질책했다. "자기네의 영달과 이익만을 좇고, 위협에 겁을 먹어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었다."고 했다. 훗날 그도 친일 행적이 밝혀지면서 서훈이 박탈됐지만 '친일파'가 득세하는 당시의 흐름에 저항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몸부림은 서슬이 퍼렜고 의연했다.

그리고 한 세기가 더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 또다시 '양심을 버리고, 나라마저 팔아먹으려는 도적'들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면서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당장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대법원의 일제 강제노역 배상 판결을 놓고 반발하는 일본에 유감을 표명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불필요하게 일본을 자극하고 있다"고 했다. 자유한국당에서도 "문재인 정부가 한일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억지 주장이 나왔다. 자신의 지지기반인 극우세력의 결집을 위해 억지 주장과 역사 왜곡을 밥 먹듯 하는 일본 아베 정권의 데자뷔다. 자유한국당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국회의원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두고 한 막말도 그 연장선이다. 특히 5·18을 '폭동'으로 호도하고 유공자를 '괴물집단'이라고 폄훼한 것은 분열과 갈등을 통해 극우라는 구태를 불러내려는 한다는 점에서 군국주의의 망령과 다르지 않다. '깜'도 안되는 정치공세에 매달리다 제풀에 지쳐 이제는 안보와 지역감정을 내세워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연장하려는 '뻔한 꼼수'도 민족주의라는 보편적 보수의 가치와 거리가 멀다.

독재의 특징이 획일주의라면 민주주의의 가치는 다양성에서 나온다. 정치나 사회를 비판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누구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는 사회가 민주사회다. 그렇다고 모든 주장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보편적 사실과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억지를 모두 존중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유린했고 그 과정에서 친일파가 자기네의 영달과 이익을 좇아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하는 보편적인 사실이다. 북한군이 광주민주화운동에 개입하지 않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은 전두환 씨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은 저서 '한국통사'에서 나라가 겉모양이라면 역사는 정신이라고 말했다. 국민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있다면 설혹 순간의 어려움은 겪을 수 있지만 언제든 부흥할 수 있고 국가를 국가답게 만드는 저력도 바른 역사관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일부 정치권이 자신들의 작은 이익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옹호하고 5·18의 숭고한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배타적 국수주의를 불러오고 민족의 자존과 미래를 짓밟는 파렴치한 행태일 뿐이다. 극소수의 광기에 가까운 생각들이 확대재생산 시키는 극우적 발상 또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자충수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며 목숨마저 내놓았던 선열들의 피가 선연히 남아있고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더 나은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기 위해 할 일도 산적해 있다. 그런데도 보수를 빙자한 수구 친일세력은 국론을 분열시키는 거짓 주장을 되뇌면서 오직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양심을 팔고 있다. 평화와 공동번영이라는 거슬릴 수 없는 대세 속에 종북이나 주사파 같은 구태의연한 이념의 프레임을 꺼낸 것도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염치와 상식이 사라지고 몰염치와 몰상식이 넘쳐나는 지금, '오늘을 목 놓아 통곡한다'던 장지연의 서슬 퍼런 일갈이 더욱 뜨겁게 가슴을 후려친다. 전남취재본부 부국장

이용환 기자 yhlee@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