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디아스포라 - '맨주먹 상경의 현실'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정치일반
전라도 디아스포라 - '맨주먹 상경의 현실'
  • 입력 : 2018. 08.20(월) 14:34
  • 서울=강덕균 선임기자 dkkang@jnilbo.com

전라도 디아스포라 - '맨주먹 상경의 현실'





 1960년대 서울은 전후복구와 도시정비, 경제개발 등으로 어수선했다. 그럼에도 이촌향도로 서울을 찾은 농촌인구는 날로 증가했다. 서울은 시골서 밀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태세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10~12시간씩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맨주먹으로 달려온 서울에서 전라도 사람들을 반기는 곳을 없었다. 특히 가족과 함께 무작정 상경한 호남사람이 몸을 누일 거처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찾아든 곳이 용산 한강변~청계천~용두동~답신리~중량교 뚝방촌과 산비탈이었다. 이곳에 무허가 판자촌을 짓고 움막과 같은 곳에서 생활해야 했다. 물론 타 지역 출신도 있었지만 전라도 출신이 대부분이었다고 향우들은 증언하고 있다.

 통계청이 전국 전입ㆍ전출자 통계를 작성한 1970년대부터 전국 광역자치단체의 인구감소 추이를 보면 1970년대에 가장 인구가 크게 감소한 지역은 전북, 전남, 경남 순이었며, 1980년대 들어서는 전남, 경북, 전북 순이었다. 그만큼 전라도사람들의 서울 이주가 많았다는 증거다.

 당시 경향신문(1965년 2월6일자)을 보면, '서울 동경 무작정 상경…서울남대문경찰서 집계 하루 평균 20명' 제목의 기사는 "2월에 접어들면서 서울역 수도관문을 두드리는 무작정 상경자가 부쩍 늘었다. 서울 남대문서에 의하면 5일에 22명, 지난 4일에 20명, 지난 3일에 23명 등 매일 20여 명의 무작정 상경자가 서울역 주변에서 발견되고 있다. 성급한 봄철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어이없는 '유혹의 계절' 벌써 '식모취직' '서울동경' '먹고살기 위해' 등 구실을 메고 온 이향자(離鄕者)들이 몰리고 있어 봄을 앞두고 대책이 시급하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1960년 이후 서울인구는 폭증했다. 전쟁 직후 124만명이던 서울인구는 1965년 347만명, 1970년에는 543만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폭증하는 인구에 비해 도시기반시설이 턱없이 부족했다. 가장 심각한 것이 주택난이었다. 빈손으로 서울 시민이 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천변이나 도시외곽의 구릉지에 판잣집을 지어 정착했다. 빈터만 있으며 나무상자에서 떼어낸 판자조각으로 움막같은 집을 지었다.

 이로 인해 1965년 12.53%(3321가구)이던 서울시내 무허가 불량주택 비율이 1966년 37.75%(13만6650가구), 1970년도 32.24%(18만7554가구)로 서울 주택의 3분의 1이 무허가 판자집이었다.

 무허가 건물에 거주하는 인구의 다수는 농촌에서 무작정 상경한 무일푼의 농민들이었다. 특히 서울로 이동한 인구가 많은 전라도 사람들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천변에 움막과 같은 집에서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해 닥치는 대로 일용노동ㆍ행상ㆍ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개천가에 위태롭게 지어진 천변 판자집들은 홍수와 화재, 전염병에 취약했다.

 1950년대 말 순천에서 상경했던 오순기(82)(주)해광요업 대표이사 회장은 전남일보와 인터뷰에서 "전쟁 후여서 폭격 받은 서울시가지는 엉망이었다. 청계천이 복개 되기 전 그곳에 고향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주소를 물어 찾아가 이틀간 잠을 자기도 했다. 당시 판자집들이 즐비했는데, 실제로 전라도사람들이 많았다. 비좁고 미안하기도 해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서울시는 도시미관과 위생상태를 개선하고 현대도시 다운 면모를 갖춘다는 명목으로 무허가 불량주택 철거에 들어간다. 특히 1966년 여름 큰 홍수가 발생해 한강변의 무허가 건물들이 유실되고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게다가 1966년 10월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서울시청 앞 환영행사 때 판자집이 TV를 통해 세계에 생생하게 방영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무허가 건물지대의 철거와 함께 도시 계획추진에 박차를 가할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1968년 김현옥 서울시장은 '경리도 광주군 중부면 주택단지 조성계획'이라는 집단이주 정착지 조성정책을 발표한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원(현재 경기도 성남시)에 300만평 규모의 택지를 조성해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년간 총 10만세대 55만명의 철거민을 이주정착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곳은 60% 이상이 산세가 험하고 깊은 계곡을 끼고 있는 지형이었다. 서울시는 예산부족으로 벌목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표피만 벗겨내는 등 산림개간수준에서 택지와 도로를 만들었다. 상하수도 시설을 비롯한 생활과 생계에 관련된 도시하부시설을 거의 갖추지 않은 채 서울 무허가 판자촌에 거주하던 철거민들을 집단적으로 입주시키기 시작했다.

 '선입주, 후건설'이라는 이름으로 1971년까지 3년동안 12만명의 철거민들을 입주시켰다. 철거민들은 청계천변 등지에서 짐짝처렴 실려 이주했고 철거민들은 군대막사 처럼 지어진 가수용 천막에서 두 가구 또는 네 가구씩 수용되었다. 전기와 수도도 없는 피난민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산비탈과 구릉은 천막촌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당시 광주대단지에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회자됐다. 생활할수 있는 인프라가 전혀 없는데다 일자리 또한 전무한 상태에서 이주민들이 생활은 비참한 상황이었다.

 당시 광주대단지 추진 당시 지역개발담당관이었던 고건 전 총리는 '중앙일보'를 통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60년대 후반 서울에 개발 광풍이 불었다. 계기판 없는 불도저식 개발이었다. 무허가 판잣집에 살던 주민들은 최소한의 생계지원책도 보장받지 못하고 시외곽으로 쫓겨나는 듯 이전해야 했다.…단지 내 광주군 중부면 출장소를 먼저 찾았다. 현장은 참혹했다. 도로나 상하수도 시설도 없는 곳에 천막과 판잣집만 빼곡했다.…하루는 남한산성 너머 중턱에 있는 한 마을을 찾았다. 광주대단지 내 철거민 이주터 중 하나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영세민들이 연고도, 변변한 일자리도 없는 곳에 쫓겨왔다. 당연히 빈곤문제는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치안도 형편없어 무법지대나 마찬가지였다. 안내하던 사람이 나에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마을에서 굶주림 때문에 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풍문이 돕니다.' 비통함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민심이 흉흉했다"고 적었다.

 택지분양이 시작된 것은 철거민들의 이주가 시작된 지 6개월여 만인 1969년11월부터다. 철거민에게 각각 평당 2000원씩 20평의 땅을 추첨으로 분양했다. 그러자 투기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택지를 분양받은 철거민들은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 주택을 짓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철거민들의 절반 가량은 분양권을 팔고 다시 서울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분양권 전매가 성행했다. 분양권 전매를 통한 입주자들도 몰려들었다. 그러자 서울시가 분양권 전매 금지 조치를 내리고 경기도가 가옥에 대해 취득세를 부과했다. 생활인프라가 안돼 비참한 생활을 하던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이른바 '광주대단지 사건'이라는 것이 발생하게 된다.

 1971년 8월10일, 김현옥 시장의 뒤를 이은 양택식 서울시장이 광주대단지 현장을 찾아 주민과 직접대화를 할 예정이으나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고 갑자기 비까지 쏟아졌다. 야외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민들은 격분고 결국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약 6시간 동안 진행된 이 사건은 서울시가 무조건 수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일단락됐다.

 일련의 과정에서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간 전라도사람들이었다.

 광주대단지사건 현장에 있었던 김대화 전 재경광주전남향우회장은 "청계천 등 하천부지에서 살던 사람들의 80~90%가 호남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평당 2000원짜리 20평씩 '분양권(이른바 '딱지')를 주고 아무 것도 갖춰지지 않은 곳에다 철거민들을 퍼부어 놓았지, 당시 이주했던 선배가 하소연을 해서 버스로 비포장도로 2시가반을 타고 가보니 사람 살 준비가 전혀 안돼 있었고 정말 2~3일씩 굶어서 정신나간 사람이 태반이었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 음식을 사주었는데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이주한 사람 가운데 80%이상이 전라도 출신들이 이었지만 살 수가 없고 집 지을 돈도 없고 해서 많은 호남사람들이 분양권을 3만원에 되팔아버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아마 호남사람 40%정도만 남았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광주대단지 이외에도 서울시내 관악구 봉천동, 신림동과 송파구 거여동, 노원구 상계동과 시흥 등지도 서울시의 판자촌을 이주시킨 곳들이다. 당시 서울시내 판자촌 이주단지 중 한 곳인 관악구는 산지가 많아 하천부지에 이주촌을 조성하고 무허가로 집터만 제공하고 살도록 했다. 이곳 이주자들도 대부분 호남출신이었다. 실제로 관악구가 제2의 호남이라고 불릴 정도로 관악구에는 호남사람들이 많다고 향우들이 전하고 있다.

 상경한 호남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던 곳은 판자촌만이 아니었다. 경공업 위주의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부 구로공단의 개발로 공단 인근에 위치한 영등포구, 구로구, 금천구 등지에도 자리를 잡는다. 당시 이곳에는 구로공단에 근무한 10대 여성근로자들이 주류를 이뤘다. 특히 기숙사에서도 살지 못한 여성근로자들은 닭장촌이라 불리는 좁은 공간에서 3~4명이 한 방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지금도 이들지역 소규모 봉제공장 인근을 중심으로 호남출신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 출발한다. 청계천 인근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 등 소규모 의류 제조업체(봉제업체)들이 밀집한 곳도 마찬가지였다. 영세한 규모의 봉제공장들에서 두세평 규모의 좁은 공장에서 수십명의 젊은 노동자들이 밀집해 일하면서 햇빛도 비치지 않은 다락방 공간에서 일해야 했다.

 점차 경제개발 효과가 나타나고 서울시내 도시정비가 이뤄지면서 주택문제가 개선돼 가기는 했지만 이주자들을 비롯한 열악한 숙소에서 생활해야 했던 서민들은 판자촌에서 달동네로 갈아타는 수밖에 없었다.

 도시 외곽의 산등성이나 산비탈 등 비교적 높은 지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던 달동네는 서울시의 판자촌 이주정책이 시행되면서 더욱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달동네도 생활상은 비슷했다.

 1980년대 초 서울 마포구 아현동 달동네에서 생활했던 강모(60ㆍ나주시 금계동)씨는 "산꼭대기에 위치해 높은 계단이나 비탈진 길을 오르내리기란 쉽지가 않았고, 겨울철 눈 오는 날이면 미끄러워 다니는데 큰 애로를 느껴 곳곳에 연탄재 뿌려 오르내려야 했다"면서 "비좁은 공간에 세놓을 방만 다닥다닥 지어 화장실이 절대로 부족했다. 그래서 아침이면 화장실 쟁탈전을 벌여야 했다"고 말했다.

 달동네로 이사한 서민, 특히 많은 전라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같은 상황 속에서 생활하며 '서울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 경제가 본격 성장국면으로 돌아서면서 전라도사람들도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성공한 사람들이 속속 등장했다.

 그러나 서울에 정착한 시골 출신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경기도에 들어선 공단을 향해 또 다시 이동을 하게 된다. 특히 서울 땅값이 급등하면서 신도시 개발지, 값싼 집터나 공장지대가 있는 경기도로 계속 밀려나게 된다.

 주옥규 재경광주전남향우회 사무처장은 "우리나라가 경제개발을 통해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진입하는 과정 속에서 농촌지역에 거주했던 많은 전라도사람들이 농업으로서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개발바람이 불고 있던 서울로 이동하게 됐다"면서 "결국 이렇게 상경한 전라도 사람들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우리나라가 산업적으로 비약적인 발전하는 데 밑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강덕균 선임기자

서울=강덕균 선임기자 dkkang@jnilbo.com dukkyun.ka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