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필암서원은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장성 황룡면 필암리에 건립된 서원이다. 1975년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고,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하서 김인후 영정 필암서원 경장각 묵죽도 필암서원 확연루 하서, 문묘에 배향되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문묘(文廟)다. 문묘에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열여덟 분이 중앙의 성균관을 비롯, 전국 향교의 문묘에 모셔져 있다. 그 열여덟 분을 '동방 18현'이라 부른다. 신라의 최치원, 고려의 정몽주, 조선의 조광조·이이·이황·송시열 등이 이들인데, 호남 유일의 인물이 하서 김인후다. 호남 유일의 문묘 배향자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장성현 대맥동(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에서 참봉을 지낸 김령과 옥천조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호는 하서(河西),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어린 시절...
편집에디터2020.08.25 17:141597년 9월 16일 조선의 운명을 가른 명량전투 대해전을 재현하고 있는 모습. 고뇌하는 이순신 명량대첩비 진도 벽파진 충무공 전첩비 13대 133, 기적 같은 승리 300척을 자랑하던 무적의 조선 수군은 이순신이 3도 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난 뒤인 1597년 7월 15일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 된다. 3도 수군통제사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다 죽임을 당하였고, 300척을 자랑하던 무적의 조선 수군 함대는 하룻밤 사이에 160여 척이 격파된 후 남해 바다에 수장된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빠져나온 12척의 배만이 격침의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왜군은 칠천량 승리 뒤 한산도 일대와 고성 일대 포구에 남겨진 조선 수군의 배도 찾아내 모두 불태웠다. 7년 동안 단 한번 당한 참패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고,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가 된다. 7월 18일 패전 ...
편집에디터2020.08.11 17:01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을 정립한 실천적 지식인 삼봉 정도전이 나주 회진에서 3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머문 초사. 삼봉 정도전 초상화 도올 김용옥이 쓴 신소재동기 초사앞에 건립된 소재동비 유배지 표지판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 정도전 나주 회진에 유배와 남도와 인연을 맺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으로, 호는 삼봉이다. 향리 집안 출신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봉화호장 공미(公美)이고, 아버지는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를 지낸 운경(云敬)이다. 뒷날 이런 정도전을 두고 '한미한 출신'이라고 기록했다.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와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이숭인 등과 유학을 배웠다. 1370년, 스승인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성균박사가 된다. 성리학을 받아들인 정도전은 친명파가 되었고, 1374년 공민왕의 암살 사건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여 친원파의 거두였...
편집에디터2020.07.28 18:21인천감옥을 탈옥한 김구가 광주, 함평, 강진, 해남, 장흥 등을 돌아 보성 쇠실 마을에 숨어들어 40여 일을 지낸 김광언의 집. 김광언 집 마루에 앉아 48년 전을 회고하는 김구. 쇠실쉼터에 세워진 김구 은거 추모비 김구가 은거중 시용했던 쇠실마을 우물. 쇠실마을 은거후 떠나면서 김구가 역사서 '동국사기'의 책에 남긴 석별의 시 '이별난(離別難)'. 김구, 쇠실 마을을 찾다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은 살아생전 전남 보성 쇠실 마을을 두 번이나 찾는다. 김구가 보성에서도 오지인 쇠실 마을을 두 번이나 찾았던 특별한 인연을 알기 위해서는 2017년 개봉된 영화 '대장 김창수'의 소재가 된 '치하포 사건'을 알아야 한다. 1896년 3월, 김구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여관에서 일본군이 분명한데 한복을 입고 조선인 행세를 하는 사람을 만난다. 흰 두루마기 사이로 칼집도 보였다. 김...
편집에디터2020.07.14 18:27선생의 탯자리인 함평 신광면 구봉마을에 복원된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와 김철 선생 동상. 이돈삼 여행전문시민기자(전남도 대변인실) 제공 김철 선생을 모신 사당-구봉사 1919년 임정을 수립하고 초기 정부활동을 지휘한 국무원들과 함께 한 김철 선생(뒷줄 맨왼쪽). 김철 선생 숭모비 구봉사에 모셔져 있는 김철 선생의 영정. 전라도 대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다 나비 축제로 유명한 함평에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건립되어 있다. 왜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함평에 건립되어 있을까?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초대 임시의정원이 구성된다. 임시의정원 29명 중 전라도 대표로는 유일하게 함평 출신의 김철이 선출된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된 일강 김철, 그는 평생을 임시정부와 함께한 전남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김철이 태어나고 자란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 그의...
편집에디터2020.06.30 17:17한국광복군 주력부대인 제5지대를 이끈 나주출신 나월환 장군의 동상. 나주시 제공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 나월환 나월환의 광복군 제5지대 창설기념 사진 인도 전선에 파견된 나주출신 광복군 나동규 2014년 9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나월환 광주·전남 출신 광복군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정착지였던 쓰촨청(四川省)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된다. 한국광복군은 한말 의병과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의 전통을 계승한 무장 조직이었고, 1946년 5월 복원선언을 발표하고 해산할 때까지 6년여 동안 중국 일대에서 활동했다. 6년 여 동안 존재했던 한국광복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1945년 4월 임시정부 군무부장이 김구에게 보고한 보고서를 보면 총사령부와 3개 지대의 장교 및 사병은 총 5...
최도철 기자2020.06.16 18:34장흥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 계곡에 있는 동양 3보림 가운데 하나인 보림사(寶林寺)는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와 문을 연 우리나라 선종의 종갓집이다. 장흥군 제공 보조선사 체징 영정 9세기 불교 미술의 기준, 장흥 보림사 장흥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 계곡에 있는 보림사(寶林寺)는 동양 3보림(인도, 중국, 한국)의 하나로,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와 문을 연 우리나라 선종의 종갓집이다. 따라서 보림사는 남도 불교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불교 및 문화사에서도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은 "한국 미술사 혹은 문화사에서 장흥 보림사가 갖는 위치는 절대적"이라면서, "만약 9세기 신라 하대의 문화를 논하면서 장흥 보림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면, 그 책은 엉터리"라고 단언할 정도다. 9세기는 신라 문화의 중심이 경주에서 지방으로, 사상적으로...
최도철 기자2020.06.02 17:41동학 농민군의 주 무기였던 죽창 형상으로 만들어진 장성 황룡 전투 '동학농민군 승전기념탑'. 장성군 제공 황룡전투를 승리로 이끈 녹두장군 전봉준 동학군의 신무기 장태 전승기념탑 청동 부조물 농민군이 점심을 먹었던 월평장(황룡장) 장성 황룡에서 중앙군과 맞닥뜨리다 전봉준이 중심이 된 군민들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봉기,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군수를 내쫓고 아전들을 징벌한다. 고종 31년(1894) 1월이었다. 이를 고부 농민봉기라 부른다. 고부 농민봉기는 시작에 불과했다. 새로 부임한 군수 박원명이 농민의 잘못을 묻지 않겠다고 회유하여 자진 해산했는데, 사건을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가 봉기 참여자와 주모자를 색출해 가혹하게 처벌한다. 민심과 동떨어진 수습책이었다. 이에 분노한 4천여 농민들이 3월, 무장에서 봉기한 후 백산에 집결하여 전봉준을 대장으로 한 농...
최도철 기자2020.05.19 16:44한말 호남 최대 의병항쟁지 가운데 한 곳인 광주 광산구 어등산 전경. 광주 서구 농성광장 김태원 의병장 동상 형제가 의병장이 되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전라도 의병들을 토벌한 기록인 '전남폭도사'를 보면, 일제는 우리 의병을 폭도나 비도 혹은 적으로, 의병장을 적장이나 수괴(首魁) 혹은 거괴(巨魁)로 표현하고 있다. '전남폭도사'는 1913년 일경 전라남도 경무과에서 작성한 기록인데, 1906년부터 1907년을 제1기, 1908년을 제2기, 1909년을 제3기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각 시기별 거괴로 제1기에는 최익현·고광순·기삼연을, 제2기에는 김태원·김율을, 제3기에는 전해산·심남일·안규홍을 꼽고 있다. 일제가 제2기의 거괴로 꼽은 김태원과 김율은 형제다. 일제는 이들 형제를 동학당 이후 가장 용맹하고, 그 신출귀몰함이 난형난제(難兄難弟)라고 칭하면서 혀를 내둘...
편집에디터2020.05.05 17:50조광조 영정 정암 적려유허비 조광조, 능주에 유배와 사약을 받다 소설가 최인호의 마지막 역사소설 '유림'은 화순 능주에부터 시작된다. 이는 유림들의 큰 스승이며, 문묘에 배향된 정암 조광조(1482~1519)가 유배와 사약을 받은 곳이 능주였기 때문이다. 조광조는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 중인 김굉필을 만나 스승으로 삼고, 김종직의 학문을 전해 받는다. 중종 10년(1515), 과거 급제 후 성균관 전적(정6품)을 시작으로 수찬·교리·경연시독관·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한다. 과거 급제 4년 만에 종2품 대사헌의 수직 승진은 대단한 파격이었다. 대사헌은 지금의 검찰총장에 해당되는 자리이니, 당시 사림의 거두 조광조의 권력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광조와 사림들은 향약 실시, 소격서 폐지, 현량과 실시 등 혁신정책을...
최도철 기자2020.04.21 16:12모든 승탑을 제치고 교과서에 실린 '국보 제57호 철감선사 승탑'이 있는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영정 철감선사 승탑 승탑 수막새에 새긴 연꽃 불타기 전 대웅전 모습 극락정토에서 노래하는 극락조, 가릉빈가 우리나라에 승탑(僧塔)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신라 말 유행한 선종 불교와 관련이 깊다.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중시한 선종(禪宗)은 깨우침을 인도해주는 스승이나 정신적 지주인 멘토(mentor)를 매우 중시했다. 그래서 선종 불교에서는 깨우침을 안내해주는 스승을 부처님처럼 소중하게 모셨고, 스승이 입적하면 화장 후 사리(舍利)라 불리는 구슬 모양의 유골을 모아 멋진 조형물 속에 안치했는데, 이를 승탑이라고 한다. 신라말 고려 시대의 멋쟁이 승탑 대부분은 팔각원당형이다. 팔각형인데 '둥근 집'이란 뜻의 '원당(圓堂)'이 붙은 것은, 팔각형이 원형에 가장 근접하기 때문이다. ...
편집에디터2020.04.07 13:11오페라로 만나는 왕건과 장화왕후 장화왕후 오씨 유적비 고려 현종 나주 몽진 금성관 사마교비 장화왕후 오씨가 완사천에서 고려 태조 왕건에게 버들잎을 띄운 물그릇을 건네고 있는 모습. 필자 제공 장화왕후, 왕건을 만나다 왕건과 견훤이 후삼국의 패권을 놓고 일전을 벌였던 현장이 영산강을 끼고 있는 나주 일대다. 나주 이외의 지역에서도 두 세력이 맞붙어 싸우곤 했지만, 힘의 균형을 갈라놓은 곳은 왕건이 화공(火攻)으로 견훤의 수군을 크게 이긴 '덕진포 전투'가 행해진 영산강이었다. 광주·전남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나주 호족만큼은 왕건을 지지했다. 나주 호족의 왕건 지지는 역사적 격동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가져온 역사적 사건이 된다. 나주 호족과 왕건과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빨래하는 우물 샘, 완사천(浣紗泉)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
편집에디터2020.03.24 16:23기삼연 의병장이 일본군 폭도토벌대에게 붙잡히기 전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담양 금성산성. 장하도다 기삼연 1910년 무렵 전라도 일대에서는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 같다 전해산, 잘 싸운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라는 동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동요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른은 물론 어린아이들까지도 우상으로 여긴 남도 의병장들이다. 이 중 맨 앞에 등장하는 기삼연은 1907년 장성 수연산에서 거병한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으로, 한말 호남 의병의 큰 물꼬를 튼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김죽봉은 광주 농성광장에 동상이 세워진 김태원 의병장을, 안담살이는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교과서에 이름이 실린 보성 출신의 안규홍을, 박포대는 기삼연 의진의 부장인 박도경을 가리킨다.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 사후 부장이었던 김태원, 전해산, 이석용, 심남일, 박도경 등이 남...
편집에디터2020.03.10 16:26동학농민운동 4대 전적지 중 하나인 사적 제498호 장흥 석대들 전적지. 장흥군 제공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석대들 전적지 동학농민운동 관련 전적지 중 사적 제498호로 지정된 장흥 석대들 전적지는 정읍 황토현(사적 제295호)과 공주 우금치(사적 제387호), 장성 황룡촌(사적 제406호)과 더불어 4대 전적지다. 전라도 지방군을 격퇴한 황토현과 중앙군과 싸워 이긴 황룡촌, 일군에 쓰러진 우금치 전적지는 교과서 본문에 실려 있고, 기념탑도 게재하고 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 최후의 격전지인 장흥 석대들 전적지는 농민군 4대 전적지임에도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다. 1894년 12월 4일(음력) 벽사역을 점령한 농민군은 12월 5일 장흥부 장녕성(장흥성)을 함락했다. 장녕성이 함락되면서 장흥부사 박헌양과 장졸 96명을 비롯한 500여 명의 읍민이 죽임을 당한다. 장녕성 함락으...
편집에디터2020.02.25 14:10금성관 뜰 비석 망화루 벽오헌 전패 조선 시대 가장 규모가 큰 객사 금성관. 금성관, 보물 2037호 지정 문화재청은 지난 2019년 10월 2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인 나주시 과원동에 위치한 객사 금성관(錦城館)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2037호로 지정했다. 객사란 관찰사가 관찰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는 곳이자, 중앙 사신이 지방에 오면 묵던 숙소였다. 특히 객사의 정청은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望闕禮, 나무패에 절하는 의식)를 행하던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사신을 접대하고 왕정의 위덕을 펴 관부의 위엄을 세웠던 장소, 즉 지방궁궐이었던 셈이다. 전국의 수 많은 객사 중 왜 나주 객사인 금성관이 보물이 되었을까? 객사는 정청과 좌·우익헌(동·서익헌)으로 구성되는데, 금성관의 중심 건물인 정청은 조선시대 객사 중 가장 크다....
편집에디터2020.02.11 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