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가 머리로 역류하는 분노를 느꼈다. 가뜩이나 그놈들과 한 차에 통학하면서도 민족 감정으로 서로 멸시하고 혐오하여 지내온 터인데, 그들이 우리 여학생을 희롱하였으니 나로서는 당연한 감정적인 충격이었다. 더구나 박기옥은 나의 사촌 누님이었으니, 나의 분노는 더하였다. 나는 박기옥의 댕기를 잡고 장난을 친 후쿠다를 개찰구 밖 역전 광장에서 불러 세우고, 우선 점잖게 따졌다.’ 박준채(1914~2001) 선생의 회고집 ‘독립시위로 번진 한·일 학생 충돌’의 일부분이다. 박준채는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1929...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2024.10.31 16:29한때 1000명 넘게 살았다. 자연마을이 10여 개나 됐다. 인근 섬지역 물산도 모두 이곳으로 모였다. 어업협동조합 지점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인구는 반토막 났다. 빈집이 지천이다. 물산도 모이지 않는다. 분기점이 진도대교 개통이었다.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를 잇는 다리가 놓이면서 섬까지 자동차가 드나들었다. 물산은 차에 실려 보내졌다. 낚시꾼도 차를 타고 섬으로 곧장 들어갔다. 울돌목은 바닷물의 거친 숨소리보다 자동차 소리로 더 요란해졌다. 젊은이들은 학교와 일자리를 찾아 대처로 블랙홀처럼 빨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2024.10.17 17:51한낮 마을이 고요하다. 길에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마을 앞 들판에선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마을길을 따라 해찰하는데, 관광버스가 보인다. 고택 앞이다. 고택 안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어 들려온다. 사람이 많이 모인 것 같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왁시글덕시글하다. “마침 잘 왔소. 기러기 아범이 없었는데, 잠깐 도와주쇼.” “예?” “잠깐이면 돼요.” 고택체험 프로그램으로 전통혼례식을 하는데, 기럭아범 역할을 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다. 잠깐이면 된다는 말에 거절 못하고, 이끄는 데로 따라 들어갔다. 한쪽에서...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2024.10.03 17:33‘드넓은 나주평야 호남의 명촌/ 노령산맥 서기 받은 식산 자락에/ 세 갈래길 물줄기로 내천(川) 자를 그려서/ 아름답게 펼쳐진 도래마을/ 선비정신 얼을 살려 유교문화 지켜가는/ 선조들의 숨결 가득한 유서 깊은 도래마을….’ 홍건석이 지은 ‘도래마을 노래’ 앞부분이다. 도래마을은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에 속한다. 마을을 식산(食山)이 품고 있다. 식산 감투봉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세 갈래로 내 천(川) 자를 이룬다고 ‘도천(道川)마을’이었다. 우리말로 바뀌면서 ‘도내’에서 ‘도래’가 됐다. 배산임수 지형 그대로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전라남도 대변인실2024.09.19 18:28여수에서 돈 자랑 말고,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 했다. ‘장흥에 가선 문장(글) 자랑하지 말라’는 말도 있다. 전라남도 장흥은 백광홍과 백광훈 등 많은 문장가를 배출했다.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이승우 등 내로라하는 현대문학 작가도 즐비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장흥군을 문화관광기행특구로 지정했다. 장흥은 문림고을로 통한다. 장흥에서도 문장을 대표하는 마을이 사자산 아래 기산(岐山)마을이다. 중국 주(周)나라 도읍 기산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이름 붙었다. 기산마을은 ‘팔문장마을’로 통한다. 문장가 8명이 난 데서 비롯됐다. 8...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전라남도 대변인실2024.09.05 17:41‘우리는 임진왜란을 안다. 모르는 이가 없다. ‘임진왜란’하면 충무공과 거북선을 연상한다. 그러나 거북선 제작에 큰 공을 세운 나대용 장군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여기에 나대용 장군의 사적을 밝혀두는 이유다.’ 체암 나대용 장군 기적비에 새겨진 비문의 일부다. 기적비(紀蹟碑)는 1975년 나주시 문평면에 세워졌다. 비문을 이은상이 지었다. 이은상은 당시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었다. 기적비 옆에 나대용 동상과 함께 거북선 조형물도 조그맣게 세워져 있다. 나대용을 모신 사당 소충사(昭忠祠)도 있다. 1978년 세운 ...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전라남도 대변인실2024.08.22 18:22환상경이다. 하늘 파랗고, 물빛도 파랗다. 무더운 날씨 탓일까? 하늘과 구름이 물에 몸을 담갔다. 물가 숲은 짙푸르다. 진녹색 숲이 물길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물안개 피어오르면 더욱 멋지겠다. 안개 자욱한 날엔 몽환적이겠다. 비라도 내리면 운치까지 입혀지겠다. 이 숲이 김삿갓의 방랑벽을 멈춰 세웠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돌던 김삿갓이 여기서 방랑을 끝냈다. 그의 첫 무덤이 지척에 있었다. 김삿갓이 말년을 지낸 압해정씨 종갓집도 복원돼 있다. 연둔리 숲정이다. 숲정이는 마을 근처에 우거진 숲을 일컫는다. 연둔리 숲정이는 ...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2024.08.08 17:38‘담양’하면 대나무, ‘대나무’하면 죽녹원이 먼저 떠오른다. 죽녹원은 공원으로 꾸며진 대숲이다. 하늘이라도 찌를 것처럼 쭈욱- 뻗은 대나무를 보면 눈이 후련해진다. 대나무의 맑고 청신한 기운도 마음속까지 상쾌하게 해준다. 댓잎이 서로 몸을 부대끼며 나직하게 들려주는 연주음도 감미롭다. 대숲에서 즐기는 죽림욕도 좋다. 온갖 시름 다 잊게 한다. 피를 맑게 하고, 공기를 정화시켜주는 음이온 덕분이다. 실제 대숲의 체감온도가 숲밖보다 4∼7℃ 낮다. 대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한 것도 이런 연유다. 대숲에서 이슬을 먹고 자라는...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2024.07.25 18:44‘날이 저물어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했다. 구례읍성 북문 밖으로 가서 잠을 잤다.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한다. 곧바로 손인필이 곡식을 갖고 찾아왔다. 손응남은 올감(早枾)을 바쳤다.’ 1597년 8월 3일 자 이순신의 〈난중일기〉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돼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첫날 구례에서의 이야기다. 때는 여름 무더위가 끝나고, 초가을 내음이 묻어나기 시작한 양력 9월 13일이었다. 이순신은 손응남이 갖고 온 올감을 한입 베어 물며 원기를 되찾았다. 올감은 이른 감, 갓 수...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2024.07.11 18:13‘기행가사(紀行歌辭)’ 하면 송강 정철이 떠오른다. 실학의 상징 인물은 다산 정약용이 먼저 생각난다.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선입견이다. 기봉 백광홍과 존재 위백규가 있다. 백광홍(1522∼1556)은 정철보다 앞서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 가사문학의 첫 작품이다. 〈관서별곡〉은 왕명을 받은 백광홍이 관서지방으로 떠나는 순간부터, 도착해서 부임지를 순시하기까지의 여정과 심정을 그렸다. 25년 뒤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큰 영향을 줬다. 백광홍은 열 손가락에 꼽히는 조선시대 문장가다. 위백규(1727∼17...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2024.06.27 15:25소나무와 감나무 한데 어우러진 장독대가 멋스럽다. 옛 풍경 그대로다. 그 너머로 기와집의 머리가 살짝 보인다. 한눈에 봐도 무게가 느껴진다. 보통의 집이 아님을 직감한다. 경험칙이다. “사당입니다. 불천위(不遷位) 중에서도 권위가 가장 높은 국불천위입니다. 불천위는 공신이나 덕망 높은 분에 대한 제사를 특별히 지내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가리킵니다. 사불천위, 향불천위, 국불천위 세 가지가 있어요. 불천위는 위패를 함부로 옮겨서도 안 됩니다.” 고영준 어르신의 말이다. 고영준 어르신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2024.06.13 17:18어린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놀고 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딱지(플라스틱)치기도 한다. 나무 둥치를 타고 오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연둣빛 웃음을 지어 보인다. 문득, 초등학교 다닐 때가 떠올랐다. 독후감 발표회를 여기에서 했다. 운동회 날이면 장기자랑 무대였다. 졸업앨범 사진도 나무를 배경으로 찍었다. 중학생 때도 매한가지였다. 사람들 눈을 피해 다른 동네 여학생을 만난 곳도 나무 아래였다. 그날 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친 달빛이 황홀했다. 나무 그늘은 마을 어르신의 쉼터였다. 마을 대소사도 여기에서 이야기됐다. ...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2024.05.30 17:34싱그러운 봄날이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온통 연녹색이다. 차밭도 떠오른다. 발길이 보성으로 향한다. 인지상정이다. 보성은 차의 주산지다. 보성에 대규모 차밭이 조성된 건 일제강점 때다. 활성산 일대가 따뜻하고 강수량이 많은 덕분이다. 바다와도 가까워 새벽안개가 자주 끼는 것도 한몫했다. 수분 공급이 잘 되기 때문이다. 보성의 차 재배면적이 1000㏊ 넘는다. 녹차 생산량은 전국의 40%에 이른다. ‘차밭하면 보성, 보성하면 차밭’이 연상되는 이유다. 보성차밭은 가장 인기 있는 남도 여행지 가운데 한 곳이 됐다. 누구라도,...
2024.05.16 17:42첫째, 사람이나 생물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不殺人 不殺物). 둘째, 충과 효를 함께하여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忠孝雙全 濟世安民). 셋째, 왜와 서양 오랑캐를 물리쳐 우리 도를 밝힌다(逐滅倭夷 澄淸聖道). 넷째, 군대를 몰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신과 귀족을 모두 없앤다(驅兵入京 盡滅權貴). 동학이 내세운 4대 강령이다. 봉건과 외세 반대를 내세우며 떨쳐 일어난 동학혁명이 올해 130주년을 맞았다. 지난해엔 동학혁명 관련 주요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백성이 주인 되어 외친 자유와 평등, 인권이 세계에서 ...
2024.05.02 18:31시간 참 빠르다. 매화 흐드러진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매실이 달렸다. 휑-하던 들녘도 마늘, 양파와 유채꽃으로 생기를 띠고 있다. 산자락과 과원엔 배꽃, 사과꽃, 복숭아꽃이 활짝 피었다. 봄까치풀, 광대나물, 별꽃, 꽃마리 등 들꽃도 지천이다. 앙상하던 나뭇가지도 어느새 연둣빛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파리 한 줌 쥐어짜면 손바닥에 연녹색 물이 들 것 같다. 도로변 마을 앞에 나무가 길게 줄지어 있다. 팽나무가 많다. 느티나무도 보인다. 도로변 가로수이고,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이고, 마을숲임을 금세 알 수 있다. 수령 수백 ...
2024.04.18 10:44